Q.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난중일기는 어떤내용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순신의 일상 또는 전쟁 그런 내용들입니다실제 내용이 있어서 첨부합니다.임진년 (선조 25년 : 서기 1592년(48세))/ 1592년 1월 1일 ∼ 8월 27일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전(신묘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한 충무공은 미구에 왜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좌수영 관할 아래 모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장비도 보강 하는등 온갖 방비를 주력하였다. 임진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완성 시범 항해를 하자 하루뒤인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 다. 공은 전선 24척을 모아 5월 4일 출동하여 5월 7일 제1차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데 이어, 5 월 29일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하고 6월 2일 당포에서 승첩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당포해전 이었다. 그리고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후 9월 1일 부산 앞바 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후 9월 1일 부산 앞바다에서 제4차 부산대승첩을 거두어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다.계사년 (선조 26년 : 서기 1593년(49세)) / 1593년 2월 1일 ∼ 9월 14일계사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자기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던 공은 7월 15일 여수 좌수영 본영을 그대로 둔채 전투 본부를 거제 한산도 진으로 옮겨 왜적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고,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위를 새로 만 들어 8월 15일 공을 임명하여 삼도 수군을 통괄하는 한편 전라좌수사까지 겸임하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공은 장기전에 대비하여군무에 정진, 수만석의 군량을 확보하고 전선을 만들었 으며 각종 무기를 준비하였다.갑오년 (선조 27년 : 서기 1594년(50세)) / 1594년 1월 1일 ∼ 11월 28일명나라 장수들은 일방적으로 강화를 주장하고 싸움을 피하려고만 하였다. 3월에 명나라 지 휘관은 공에게 싸움을 중지하고 돌아가라는 패문까지 보냈고, 공은 우리 땅에 있는데 어디 로 가란 말이냐고 항의까지 하였다. 전염병으로 10여일을 앓는등 자주 아팠으나 군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전염병으로 죽은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고 또 글(제문)을 지어 위로해 주었다. 10월에는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 연합으로 협공하여 승리하였다.을미년 (선조 28년 : 서기 1595년(51세) / 1595년 1월 1일 ∼ 12월 20일나라는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공은 한산도 진에서 항상 바쁘게 생활했다. 군량을 준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전선을 정비하였다.병신년 (선조 29년 : 서기 1596년(52세)) / 1596년 1월 1일 ∼ 10월 11일전쟁 중에도 공은 항상 어머님을 잊지 못하였다. 일기 도처에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나타나 있으며, 휴전중의 말미를 이용하여 잠깐동안이나마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행복을 느끼 기도 하였다. 병신년은 어머님이 82세 되시던 해로 10월 7일에 본영(여수)에서 수연 잔치를 차려드린 것이 모자가 만난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정유년 (선조 30년 : 서기 1597년(53세)) / 1597년 4월 1일 ∼ 12월 30일왜와의 화의가 깨어지자 왜적은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정월, 선조대왕은 공에게 출병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본측의 간계를 꿰뚫어 본 이순신은 본 영을 벗어나 함부로 출동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옥에 갖히고, 노모는 이 소식을 듣고 고음천(여천)으로부터 고향 아산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 별세하였다. 28일의 옥고를 치르고 백의 종군이 되어나온 공은 아산에 가서 어머님의 영구만을 보고 치 상도 끝내지 못한채 전쟁터에 나가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7월 16일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삼도 수군은 전멸하였고, 다시 삼도 수군 통 제사가 된 공은 9월 16일 패잔 전함 12척으로 왜적 대함대 133척을 무찔렀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명량대해전이다. 그러나 10월 10일 셋째 아들 면의 부음을 듣고 공은 비통함에 잠긴다. 무술년 (선조 31년 : 서기 1598년(54세)) / 1598년 1월 1일 ∼ 11월 17일임진란이래 7년의 긴 전쟁은 수 많은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갔으며, 충무공에게는 최후의 전자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7월 명나라 수군과 연합 함대를 결성한 우리 수군은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순천 소서행장의 군대를 공격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 전투가 저 유명한 노량해전이다. 이때 공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나 공의 나이 겨우 54세로, 마침네 충무공은 자기의 한 몸을 던져 조국을 위기에서 영원히 살린 것이다
Q. 친일파라고 하면 이완용을 제일 먼저 말하는 이유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일 친일파로서 대표적인 인물이라 그렇습니다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러일전쟁을 도발한(1904)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조선을 전쟁터로 만드는 한편, 초전에서의 유리한 국면을 배경으로 '화폐정리사업' 등을 감행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초를 닦아 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2)'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한편 이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게 되자 일본은 이토로 하여금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에 동조하여 양위를 건의했다가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으나 계속 강압하여 결국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했다.고종을 양위시킨 이토는, 통감이 한국 정부의 시정(施政)을 '지도'하는 권리를 가지며, 법령을 제정하고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을 할 수 있으며, 고급 관리의 임명, 외국인의 고빙(雇聘) 등을 할 수 있게 하는 '정미 7조약' 체결을 요구했고, 이완용은 이에 응하여 조약을 체결했다(1907. 7. 24). 서울 남산에 있는 통감관저를 방문하여(1910. 8. 16) '합방'조약의 내용을 마무리지었고, 같은 날 오후 내각회의를 열어 그것을 통과시킨 후 다시 어전회의 절차를 거쳐서(8. 22) 그날로 "한국 황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 양여한다"는 '합방'조약을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이름으로 조인함으로써 그는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매국의 원흉이 되었다. 이후 '내선인친목회'를 발기하고 '조선귀족회' 부회장이 되어 일본을 드나들면서 일본 국왕을 만나는 등 친일행위를 계속하였는데, 고종이 죽고 그 장례를 이용하여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에 걸쳐 조선 민족에 대한 이른바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후 이완용은 후작으로 승작했고(1921), 아들 항구(恒九)도 남작을 받았으며 손자 병길(丙吉), 병희(丙喜) 등도 모두 귀족으로서 일본에 유학하는 등 친일파 수괴로서의 갖은 '영화'를 누리는 한편,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Q. 영어가 왜 국제어로써 널리 쓰이게 됬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째는 정치적인 영향력입니다. 먼저 중세 이후로 계속된 식민지 정책과근대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등이 영어의 세계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둘째는 경제적 영향력입니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와 호주 등 영어권 국가들이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을 이끌고 가면서영어가 전세계적으로 퍼진 것입니다. 셋째는 문화적 영향력입니다.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와 영국의 007시리즈를 필두로수많은 영화, 잡지, 신문, 방송 등이영어를 세계어로 만들었습니다. 넷째는 영어권 국가를 향한 동경과 열망이 영어의 붐을 일으켰고오늘날에는 이미 세계어가 되어서마치 세계화의 표준이 영어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외에도 많지만 대략 이런 이유들 때문에세계화의 선두 대열에 서려면우리는 영어를 필수적으로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