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일본이 만화산업이 발달하게된 배경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 에니메이션의 역사...1945년 무력을 통한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꿈꾸던 일본의 야망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2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전후 패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거대한 문화조류는 "문화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새로운 기대를 일본인들에게 가져다 주며 세계 문화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이제는 처음의 미국 애니메이션을 쫓는 입장에서 벗어나, "재패니메이션", 혹은 "아니메"라는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또 다른 일본산 문화폭탄인 "망가"와는 차별화되는 "재패니메이션"만의 작품영역을 만들며 성장해 가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재패니메이션의 50년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1950 년대 - 재패니메이션의 여명전쟁의 폐허 속에 이전까지 금지되어 왔던 미국의 만화영화가 1950년부터 연속적으로 개봉되면서,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1956년 메이저 영화사인 도에이(東映)가 자회사로 애니메이션 전문업체인 도에이 동화를 설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도에이 동화는 광고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자금공급을 충당하여 1958년 일본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을 공개하였는데, "백사전"의 대성공은 이후 도에이 동화를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천황으로 군림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1960 년대 - TV 애니메이션 시대의 개막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의 성공은 60년대로 이어져 연이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제작, 공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8년에는 일본 만화의 아버지 "데츠카 오사무"가 도에이 동화의 장편 애니메이션 "서유기"의 원안구성과 연출을 위해 "오사무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저패니메이션 전성시대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데츠카 오사무"의 "오사무 프로덕션"은 1968년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인 "철완 아톰"을 제작하여, 후지TV 계열로 방영하였는데, 평균 시청율 25%라는 경이적인 시청을 올리며 TV 애니메이션 제작 붐의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철완 아톰"은 기존의 풀모션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던 엄청난 제작비와 제작시간이라는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리미티드(limited) 기법을 고안, TV 시리즈물을 만들더라도 광고를 낼 스폰서만 잡으면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오사무 프로덕션은 "철완 아톰"의 후속작으로 일본 최초의 칼라 TV용 애니메이션 "정글 대제"를 제작, 방영하여 60년대 TV 애니메이션 붐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70 년대 - TV 애니메이션 시대의 개막가장 일본적이면서도 무국적성을 가지는 재패니메이션의 대표적인 장르인 SF 거대로봇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1972년 방영된 "마징가 Z"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나가이 고" 원작의 "마징가 Z"는 기존의 "철완 아톰", "에이트 맨" 이나 "철인 28호(최초의 철인 28호는 지금의 모습과는 체형이나 외형에서 이후의 철인 28호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인간과 닮은 사이보그의 모습이 아니라, 거대한 외형의 강철전투머신으로, 방영 시작부터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이러한 거대로봇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이후 후속편으로 제작된 "그레이트 마징가", "겟타 로봇", "UFO 로봇 그랜다이져(나가이 고 원작이 아니다.)"로 이어져 70년대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장르를 만들어 갔다.한편 거대로봇물 외에도 70년대에는 재패니메이션 최고의 전성기라고 해도 될 만큼 많은 인기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우주전함 야마토"는 1974년 TV 방영당시에는 별다른 인기를 모으지 못하였다. 하지만 TV판을 재편집한 극장판의 개봉시에는 20, 30대의 성인 관객들이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설만큼 하나의 사회적 붐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애니메이션의 마케팅 대상을 기존의 아동, 청소년층에서 20대 이후의 관객들로 전환시켜, 성인용 애니메이션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또 다른 작품 "은하철도 999"는 TV판의 인기뿐만 아니라 1979년 극장판의 경우 흥행수입 16억엔으로 그해 극장흥행순위 1위를 기록하였으며, 주제곡을 수록한 OST는 아직까지 역대 앨범판매 순위에서 2위를 기록하고 있을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다.그리고 1979년 새로운 스타일의 로봇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이 나고야TV의 전파를 방영되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였다.* 1980 년대 - 재패니메이션의 새로운 물결, OVAOVA란 TV로도, 극장에서도 볼 수 없는, 비디오 매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일컫는 말로, 1980년대 재패니메이션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장본인이다.유통경로가 다른 만큼 특정대상을 직접 공격할 수 있고, 소위 오타쿠라고 하는 매니아집단이 존재하는 만큼 상업적인 성공에 크게 의존하지도 않아 작품의 수준과 작품의 내용에 보다 자유로운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OVA는 재패니메이션의 흥망을 좌우할 키워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최초의 OVA는 1984년 제작된 "달로스(DALLOS)"로 비록 흥행에는 실패하였지만 이후 OVA의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미국 시장에도 진출하여 본격적인 재패니메이션 수출의 계기가 되었다."달로스"이후 전세계적으로 본격 보급되기 시작한 재패니메이션은 "아키라", "드래곤 볼" 등의 세계적인 성공으로, 하나의 범세계적인 문화장르로서 공감대를 형성하여, 재팬 애니메이션이 아닌 재패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문화조류를 만들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였다.한편 1980년대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축이된 "지브리 스튜디오"가 발족, 지브리만의 독자적인 하이퀄러티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여 80년대를 대표하는 재패니메이션 스튜디오로 군림하였으며,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은 마침내 1997년 "모노노케 히메"라는 공전절후의 대작 제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90 년대 - 세계 속의 재패니메이션90년대 재패니메이션의 최대 화두는 당연히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모노노케 히메"로 이야기가 모아지게 된다.아동용 오락물에서 시작된 재패니메이션이 "우주전함 야마토"이후 다소 멀어진 성인계층의 시선을 다시 집중시키고, 월트 디즈니의 배급망을 타고 세계 시장에서 당당히 메이저급으로 성장하게 된 재패니메이션.시장 규모만이 아니라, 작품 수준에서도 많은 시도와 발전이 이루어진 1990년대에는 재패니메이션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시기이자, 더욱 더 큰 성장으로의 과도적인 시기였다.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도입한 CG의 본격적인 이용이 이루어졌고, 실사와의 경계가 모호해질 만큼 사실적인 화면 처리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카우보이 비밥" 처럼 아예 애니메이션 자체를 영화화하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과거의 "재패니메이션"의 영광을 뛰어넘어 "월드니메이션"을 꿈꾸는 재팬 애니메션의 앞날에 자못 귀추가 주목된다.
Q. 토끼와 거북이는 언제 창작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비슷한 내용과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검색해본바제일 오래되보이는 삼국사기 구토설화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昔 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 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兎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 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纔上岸 兎脫入草中 謂龜曰 ‘愚哉 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默而退옛날에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을 앓았는데 의원의 말이 ‘토끼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속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어 ‘제가 그것을 얻어 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섬 하나가 있는데, 맑은 샘물과 흰 돌에,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매와 새매가 침입하지 못한다. 네가 만약 가기만 하면 편히 살아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 토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2∼3리쯤 가다가,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모름지기 토끼간이 약이 된다고 하기에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 하였다. 토끼가 말하기를 ‘허허! 나는 신명(神明)의 후예라, 능히 오장(五臟)을 꺼내어 씻어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속이 좀 불편하여 간과 심장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바로 와서 간이 아직도 그 곳에 있으니, 어찌 되돌아가서 간을 가져오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양편이 다 좋은 일이 아닌가?’ 하였다. 거북이 그 말을 믿고 되돌아갔다. 겨우 해안에 오르자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도망치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리석기도 하다. 어찌 간 없이 사는 자가 있을 것이냐?’ 하니, 거북이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Q. 친일파의 아들 우장춘 박사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우리가 어릴 때는 결구배추가 없었어요, 그래서 박사님은 배추의 불화합성을 이용하여 세계에서 처음으로 결구배추를 육종하였는데 그 배추가 청방배추입니다.그 이후로 육종의 방법을 이용하여 많은 결구 배추의 품종이 육종이 되었어요.2, 일본의 학자 키하라 히토시 박사가 씨없는 수박을 육종하였는데 이를 우장춘 박사가 우리나라에 들여와서 처음으로 씨없는 수박을 재배해서 성공하였습니다.3, 그 때에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든 다른 종간의 교배에 성공하였다.4, 다른 종간의 교배에 의해서 박사께서 삼각형 교배를 고안 했습니다.즉 흑겨자 x 배추를 교배해서 갓를 육종하고, 배추 x 양배추 교배로 유채를 육종함,양배추 x 흑겨자 를 교배하여 에디오피아 겨자를 육종 함,이를 합하여 그리면 삼각형이 됨.5, 우리나라 감자는 지금도 평야에서 재배하게 되면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는데 표시(병징)가 나지를 않습니다, 그르나 강원도 고냉지에서는 감자를 재배하면은 전염이된 감자는 병징이 표가 나므로 이를 토태해서 바이러스가 감염이 되지않는 강원도 감자를 개량하여 지금도 이용하고 있어요,6, 당시에는 감귤의 재배를 시도도 하지않았는데 박사님은 환경조사에 의해서 거제도 학동, 욕지도, 제주도에서 시험재배를 하여 제주도가 환경이 적당하여 지금과 같이 감귤이 많이 생산하게 되어 매년 감귤을 저가로 먹게 되었는데 박사님이 그렇게 했어요.
Q. 흥선대원군의 만동묘 철폐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왕조 말기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조선 양반 및 유림들의 학당(學堂)인 전국의 대부분 서원들을 강제로 철폐하였던 일. 서원철폐령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서폐령(書廢令)이라고도 한다. 본래 서원은 조선왕조 유림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선조들을 배향하며 충효예를 가르치던 곳으로 성균관, 향교와 함께 유림의 3대 학문의 전당으로 꼽힌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학교 및 대학원급에 속하는 교육기관이며 성년이 된 유생들에게 충효예의 교육과 선현에 대한 존경과 배향 그리고 유교의 전통성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 초기에 서원들은 유림들의 인재양성, 충효예 교육, 선현의 배향 등이 주요 목적이었으나 나중에 가서는 신분제도의 득세로 인해 양반 및 유림들의 텃세가 심해지게 되었고 가문, 학연, 지연, 사제에 관계된 온갖 비리와 부패가 난무하게 되면서 본래의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양반 및 유림들이 텃세를 부리며 평민과 천민에 대한 압박과 강요를 지시하게 되면서 갈수록 양반 및 유림들의 텃세화와 득세화로 문제가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한 사람을 중복해서 모시거나 모실 만한 인물이 아닌데 가문의 명예를 위해 무리하게 모시는 경우, 산 사람을 모시는 경우 등 폐단이 심해졌고 경제적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이 문제가 조정에까지 전해지게 되면서 숙종 조부터 사사로운 목적이나 착취 목적 등으로 서원을 세울 경우 제재를 내리고 관련 유생은 과거시험에 대한 제한을 두게 했으며 일부는 훼철화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 시절에 한 사람을 중복하여 둔 서원 등을 적발하여 철폐하기도 하였다.이를 계기로 서원 설립이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단속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원은 자꾸 늘어서 숙종조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이후 영조가 금지령을 더 강하게 재확인해야 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서원들 사이에서 유림 및 양반들의 텃세가 날로 심해지고 폐단이 더욱 심해져 서원은 이 때를 계기로 학문 목적의 기능을 일부 상실하고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악덕집단으로 낙인되어 민중들의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양반들의 텃세가 심할수록 민중들의 고통도 더해졌으며 일부 서원은 이를 빌미로 민중으로부터 향세(鄕稅)를 과다하게 징수하기도 하는 등 병폐가 심해지기도 하였다. 이후 1863년 고종의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원의 텃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조대비의 권위와 입을 빌어 서원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 서원 철폐의 명분을 쌓아나갔고 만동묘를 철폐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양요 이후 온갖 텃세와 병폐 그리고 비리로 얼룩진 전국의 서원들을 모두 철폐시키고 서원에 관련된 양반 및 유림은 퇴출하도록 하는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으며 서원과 유림들을 압박하였다. 서원 유림들과 양반가들은 만동묘 철폐 때까지만 해도 상소를 올리고 매우 강렬하게 반발했지만 고종이 매우 단호한 의지를 보이며 철폐 반대소를 꾸짖자 곧 사그라들었고 유생들이 한강에 몰려들어 통곡했다는 야사와는 달리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던 순간엔 흥선대원군의 명분이 워낙 확고했던 터라 유림의 반응은 표면상으론 오히려 조용했다. 유림들의 대응은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은 만들고 서원을 철폐하란 명에도 순간을 모면하려는 방법을 썼는데 대원군은 인평대군의 서원도 가차없이 철거하고 부실하고 비리가 많은 불량한 서원은 조사를 통해 완전 철폐하도록 하고 나머지 일부 서원은 존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철폐된 서원의 예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토록 하였고 퇴출이 된 서원들은 건물 자체가 강제 훼철되어 소실되었다. 1865년에는 우암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철폐되는 것을 시작으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으며 남은 서원들 마저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일부는 소실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의 권위와 명분에 유림 세력이 굴복하긴 했어도 서원을 600개나 닫아버린 대원군의 강단에 불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고 대원군 반대파들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서원을 마구잡이로 닫아버린 것의 폐단이 심하다고 비판하곤 했다. 이후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유림들은 고종에게 서원 복구를 대대적으로 청했는데 서원의 폐단이 심했던 것은 유림들도 알고 있던 터라 600개 다 복구해주세요~라고 하는 정신나간 양반은 없었고 화양서원, 만동묘같은 상징적인 서원들의 복구 요구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주곤 나머지 복구 요구는 씹었다. 그나마 만동묘 복구도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함으로 예전처럼 만동묘 좨주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유림들은 지치지 않고 복구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이 너넨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경할 줄 모르느냐?라고 비웃으면서 결국 시들해졌고 유림이 곧 한국사의 주도세력에서 탈락하게 되면서 서원 철폐 요구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본래 서원의 수는 650개였으나 나머지는 흥선대원군 집권기를 넘겼지만 그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만행과 남북분단으로 인해서 일부가 북한으로 넘어갔거나 한국전쟁 때 폭파와 화재 등으로 모두 사라지기도 하여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현재는 한반도에 47개 서원만이 남아있는 편이며 남한의 경우 36개가 남아있고 북한의 경우 11개 정도가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서원은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거나 복원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나머지 서원들은 완전히 소실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일부는 서원 터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