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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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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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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을사오적은 누가 가담한건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을사오적 :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을사오적이란 조산 후기에 을사조약의 체결에 가담한 다섯 매국노들을 말한다. 추가로요 을사조약에 대해서도 알려드릴게요.1. 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한다.2. 차후로는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국제적 조약이나 약속도 할 수 없다.3. 한국 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두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무를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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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에도 반려동물을 키웠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만 살펴보자면 1. 동물에 대한 인식은 지금처럼 반려동물같은 개념은 아니였고요 생각보다 박했습니다특히 왕은 반려동물 같은걸 기르면 신하들이 나서서 말릴정도로 말이죠 이유로는 조선시대 군주란 성리학적 관점으로 도인과 같은 인격 수양을 권했는데 반려동물 기르기같은 잡기는 군자의 덕목에 위배된다는 관점이 만연 해있었기 때문과당장 사람이 먹고살기도 힘든 시대에 왕이 반려동물을 기른다는게 그시대에선 좋지 않게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조선왕조 실록에도 간간히 언급되는 사안입니다 특히 동물을 좋아한 성종때 이런 논의가 많은 편입니다 크게 예를 들자면 성종8년에 성종이 기르던 원숭이에게 옷을 입혀주자 신하들이 반대한 원숭이옷 사건과 성종 17년에 가뭄이 들자 성종이 매를 길러서 그런거라 간한 사건들 등이 있습니다 ​ 반면에 양반 계층은 반려동물의 개념으로 특이하게도 현대처럼 개나 고양이가 아닌 새를 주로 길렀으며 그중에서도 두루미를 주로 길렀으나 18세기에 들어 서면서는 비둘기나 앵무새를 기르는 방법도 서책으로 나올정도로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비둘기를 기르는 법이 적힌 [발합경] 앵무새를 기르는 법이 적힌[녹앵무경]등이 돌아다닐정도로 양반 사이에서는 새를 기르는게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잡습니다 하지만 이는 양반 계층등 기득권층이나 가능한 일 이었기에 조선시대 평민들은 자기가 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에 반려동물 같은 개념은 자리잡지 못햇습니다 대신 동물들이 하나의 자산가치로 평가 되엇고 그에따라 관련 서적도 농업서 취급을 받았습니다 숙종때 간행된[산림경제] 같은 서책등이 존재하며 산림경제의 2권의 목양편에 가축과 새를기르는 법이 적혀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숙종때 발행된 [색경] 하권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고 이로인해 적어도 조선 중 후기까지는 반려동물보단 자산으로써의 성격이 강햇단걸 알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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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기녀와 기생의 차이점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녀 (妓女)1. 춤·노래·의술·바느질 따위를 배워 익히던 관비(官婢)의 총칭. 여기(女妓). 연화(煙花).2. 기생(妓生). 기생 (妓生)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돕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여자. 기녀(妓女). 예기(藝妓). 조선 왕조는 국가 제도적 차원에서 기녀를 관리했다.3년에 한 차례씩 중인이나 천민 중에서 기녀를 선발해 중앙의 관속도감에서 기녀 수업을 받게 했던 것이다.이들을 교육시킨 후 중앙이나 지방 관청에 파견해 관기로 활동하게 했다.당시의 기녀는 단순히 사대부의 노리개가 아닌 중요한 문화 주체였다.기녀를 지칭할 때 쓰는 ‘기’라는 글자는 당시 ‘현악기를 다룰 줄 아는 여자(技)’라는 뜻이었다.또한 기녀들은 음악·무용·시 등을 전문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기녀는 일종의 종합 예능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양반들도 기녀에게 정신적·지적 접촉을 기대했다.양반 사대부 가문의 여성들이 도덕적·윤리적 덕목에 얽매여 있던 데 반해 기녀들은 창작·예술 활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는 기녀와 양반들이 주고 받은 시들의 높은 수준에서도 알 수 있다.그러나 유교적 사회에서 기녀들의 문화·예술적 업적은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웠다. 또한 작품이나 기녀 자체에 대한 자료도 부족했기 때문에 그간 문화 주체로서 기녀에 대한 연구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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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문학 장르 중 하나인 부조리극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부조리극이란 것은 아무의미 없는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 상황연출을 통해서인생의 근본적인 무의미함과 답답함"자기 삶의 이방인"이 된 느낌을 간접 경험하게 해주는 연극입니다. ​대표적인 건​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오네스코의 [대머리여가수]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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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깬이유??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433년(고구려 장수왕 21, 신라 눌지왕 17, 백제 비유왕 7)에 우호관계를 맺으며 나제동맹이 성립되었다.고구려는 군사적 우위를 보이며 백제와 신라에 공세를 취하였다. 장수왕은 먼저 백제를 침략하여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이며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이때, 신라는 1만의 구원군을 보냈다. 481년에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여 7성을 점령하였고 미질부(彌秩夫:경북 흥해)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위협하였다. 이 당시에는 백제가 신라를 도와 고구려의 위협을 방어하였다. 493년에 백제 동성왕이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혼인하면서 433년에 시작된 두 나라의 동맹관계는 더욱 그 기초를 공고히 하였으며 551년에는 양국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를 공격, 한강유역을 빼앗았다.그러나 553년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의 한강하류지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나제동맹은 깨지고 백제와 신라는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신라의 배신에 백제의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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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어원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프랑스어로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귀족의 역사가 긴 유럽 사회에서 유래되었으며 오늘날 유럽 사회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을 지탱해 온 정신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족으로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노블리스)' 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해야 한다는 귀족 가문의 가훈(家訓)인 것으로 그 근원은 로마시대의 귀족들이 행한 것 입니다.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압장서 나가는 기사도 정신도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귀족 사회의 전통적 도덕(morale)은 로마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영국의 지도층 자제가 입학하는 이튼 칼리지 졸업생 가운데 무려 2,000여명이 제1,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시 위험한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하였습니다.미국의 철강왕 카네기, 석유재벌 록펠러에서부터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갑부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미국 부자들의 자선 기부문화도 이런 전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귀족사회를 지키려는 일종의 자구책일 수도 있지만 도덕적 의무를 다하려는 지도층의 솔선수범 자세는 국민정신을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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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종 황제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관 파천 이후 서양 열강의 이권 침탈 ​독립 협회가 창립되었고 ​고종 이명복이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대한제국을 원구단에서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라 하여 황제 즉위식 거행​​광무개혁구본신참을 모태로 개혁의 원칙을 정했다구본신참이란 옛 것을 근본으로 하여 새로운 것을 참고한다특징은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함​정치직속 입법 기구인 교정소를 설치함1899년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전제군주국임을 밝히며 황제권이 무한한 권력임을 강조지방행정을 개편하여 13도로 개편함​경제양전 사업 실시 -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가 재정 확보를 한다양지아문과 지계아문을 설치 - 토지 조사 실시최초의 토지 소유권인 지계를 발급​상공업 진흥책 - 식산흥업정책을 실시하여 근대 자본주의 국가를 도모하는 데 앞장섰다도량형을 개정하였다내장원을 통해 황실 재정을 확대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공장을 건립 하는 등에 지출​사회 개혁 - 각종 실업 학교를 세움근대적 시설을 확충​군사 개혁 - 원수부 설치(황제가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게 함) , 군력 증강 (서울 시위대 , 지방은 진위대)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장교 양성​외교 - 대표적으로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독도를 관할하게 하여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킴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을 1899년에 체결​광무개혁 의의 - 전 분야에 걸친 개혁한계 - 전제 군주권이 강하며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헤이그 특사 파견 (이준 이상설 이위종) -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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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애국가 가사를 작사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당연하게 부르고 또 부를 줄 알아야 하는 노래, 애국가.그 애국가에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숨어 있다. 바로 '애국가 가사를 누가 지었나' 하는 것이다. ▷ 1919년 3월 1일에 우려 퍼진 올드랭 사인곡의 애국가는 지금의 애국가 가사와 같다우리는 애국가 하면 안익태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작사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안익태가 1935년 현재의 애국가 곡조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애국가의 가사는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80년 전 독립을 염원하는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바로 그날,1919년 3월 1일에도 일제의 총칼 앞에서 우리 민중은 영국민요 '올드랭 사인'에 맞춰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 외국인 선교사는 기록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가사는 이미 1910년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모두 5人의 애국가 작사설!그렇다면 그 오래 전 애국가 가사는 과연 누가 지은 것일까? 애국가 작사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모두 5명-민영환, 최병헌, 안창호, 김인식, 윤치호-이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문제가 뜨겁게 달아 올랐던 1955년 이래 이 다섯명이 애국가 가사를 지었을 가능성은 후손과 학자들에 의해 끊임 없이 제기됐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애국가 작사자를 밝힐 열쇠- 증거자료 철저 분석!5인의 애국가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문헌기록과 증언 친필 자료 등을총망라하여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의문을 풀어본다.1. 민영환이 지었다는 애국가는 '대한제국 애국가' 대한제국 시대엔 또 다른 애국가가 있었다.2. 정동교회 초대목사 최병헌은 사택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불변가를 지었다. 그것이 현재의 애국가라는 후손의 주장. 그러나 6.25때 사라진 불변가. 불변가는 과연 존재했을까?3.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무수한 증언들, 그 증언의 허와 실은?4. 내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김인식의 증언과 일기!5. 일본 외무성에서 발견된 '1910년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윤치호의 애국가!음악시평 ‘애국가고’안창호 작사설 극력 부정1948년 9월22일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공포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한다. 이 기관은 일제하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적극적으로 도운 친일분자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는 일을 기본업무로 하였으며 ‘반민특위’로 약칭되었다.반민특위가 가동을 시작할 무렵인 동년 10월6일부터 3일간 동아일보에는 좌익계열 음악평론가 박은용의 ‘애국가고’라는 음악시평이 실린다. 묘한 시기에 발표된 이 글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거론한 최초의 신문보도로 꼽히고 있다.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1947년 5월 출판된 춘원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기록한 것에 대한 반론 제기에 있음을 밝힌 박은용은 애국가의 을 극력 부정하고 대신 친일분자로 거론되고 있던 을 극력 주장한다.《도산 안창호전》 제6장 ‘상해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상해임시정부 국무원은 매일 아침 사무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원래 애국가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애국가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좌익활동을 하다 이후 월북한 박은용은 우익성향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안창호에 대해 적의에 찬 맹공을 가한다.“실로 무근거하고 허망한 것은 안창호 작사설이다. 도산은 1978년생이니까 애국가가 저작된 독립협회 발족 당시엔 불과 17,8세의 소년이었으며 더구나 그는 독립협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다. 있다면 그도 당시 많은 청년들과 같이 가담했다가 뒤에 임정에서 교시한데 불과하리라.”박은용은 (주관적인 견해를 상당히 표명하며) 애국가의 윤치호 작사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윤기선의 집에 전해오는 윤치호의 필적 중에는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실명이 붙은 애국가의 가사지가 있다. 그의 다른 필적과 대조해 보아 틀림없는 그의 친필이다.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의한 관사가 붙게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친필이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은 애국가가 작사된 연대에 관한 일이다. 윤씨의 가사지에는 1907년 작이라고 쓰여 있으나 내 생각 같아서는 그것을 필서한 연대의 기록일 것이다.기자협회 발행인 협보 제2호에 게재된 서정주의 에는 ‘독립협회 발족 당시에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정주의 말에 의하면 이 사실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구술을 받은 필기 중의 일절이라고 하니 여기에 더 의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립협회 2대 회장을 지낸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할 가능성은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뒤 개화청년들의 입을 통해 구전해 오던 것을 1907년 윤치호는 느낀바 있어 우연히 이것을 필사하고 여기에 필사한 연대를 적기했던 것임은 눈으로 보듯이 확연하다. 윤치호는 1908년에 15장으로 된 를 그의 이름으로 발행했는데 그 14장에는 이 애국가를 수록까지 하였다. 이 책은 본인이 소지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공개할 용의가 있다.”박은용이 ‘애국가고’에서 최초로 언급한 와 는 이후 애국가 작사자 규명과정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그 증거력에 찬반양론이 맞서게 된다.반민특위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던 일제경찰 출신들의 협조기피로 조사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정부와 여당의 공작으로 1949년 8월 22일 반민특위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이 기구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폐지된다.애국가의 작사 윤치호다 주장그동안 애국가의 작사자로는 최병헌설, 윤치호설, 안창호설, 김인식설, 민영환설, 남궁억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어 왔는데 어느 주장에 의해서도 결정적인 근거나 사료가 제시되지 못했으며,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애국가의 작사자는 미상으로 남겨져 왔었다.‘동해물과 백두산…’ 애국가 가사를 독립신문 사장과 대성학교 교장을 지낸 윤치호(尹致昊·1865~1946)가 지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가 미국에서 발견됐다. 기독교 서지연구가 신인수(서울 회현교회 장로)씨는 ‘윤치호 쟉(작)가 애국가’를 수록한 ‘셰(세)계명쟉(작)가곡집- 무궁화’ 책자를 미국 LA에서 입수해 16일 공개했다. 1931년 LA 종우서관이 펴낸 노래집으로, 편집·발행인이 LA 리들리(Reedley)지역에서 교육자로도 활약한 한석원 목사다.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scotch folk song’(스코틀랜드 민요)이라 적은 올드랭사인 곡조에 ‘동해물과 백두산…’부터 ‘이 긔(기)상과 이 맘으로…’까지 1~4절 가사와 함께 노래집 앞부분에 담겼다. 서지학자 겸 애국가연구가 김연갑씨는 “이번에 발굴한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일제의 한국 강점기 국내외서 출판된 인쇄물 가운데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명기한 최초의 자료”라고 평가했다. 김씨는 “도산 안창호가 이끈 신민회가 주관한 ‘신한민보’ 1910년 9월 21일자에 애국가 가사와 일치하는 ‘국민가’가 ‘윤치호 작’이란 이름으로 실렸지만, 제목이 ‘애국가’가 아니어서 논란이 돼 왔다”면서 “이번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곡명과 가사, 작사자가 정확히 일치해 애국가연구의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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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비유왕이랑 동성왕 나제동맹??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비류왕은 서류상이고 동성왕은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써 관계를 더욱 돈독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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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집트 파라오가 관중 앞에서 자위를 했던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파라오는 나일강의 범람을 멈추기위한 기원제를 행할 때, 나일강에 배를 타고 나가 수천 명이 백성 앞에서 자위를 통해 자신의 정액을 뿌려 나일 강의 여신 를 위로했다. 문제는 나일강 홍수가 대게 길어지면 3개월 동안 매일 자위를 해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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