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거북선만드신 이신장군님의 업적이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이순신이 처음으로 출전한 전투야. 철저한 계획하에 경상우수사 원균의 부대와 합세하여 일본의 배 26척을 무너뜨렸지. 첫 싸움이자 첫 승리인 전투이며, 이 전투를 계기로 합포와 적진포 등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어. 이 전투의 공으로 종2품으로 승진하게 되지.2) 한산도대첩(1592년 7월 8일)좁은 견내량에서 싸우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배 5척으로 적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하여 싸운 전투야. 학이 날개를 펼친 듯 배를 배치한‘학익진’전술로 일본 수군에 대승을 거두었어.3) 명량대첩(1597년 9월 16일)13척의 배로 울돌목을 통해 명량해협으로 들어온 일본 배 133척을 상대해 승리를 거둔 전투야. 수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이순신의 지도력으로 승리를 이끌어 낸 전투지. 이때 이순신은 떨고 있는 부하들에게 “한 사람이 길목을 막아 지켜도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고, 여기가 그런 곳이다.”라고 말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게 하였어.4) 노량대첩(1598년 11월 19일)전라도 지역에 있던 일본군이 500여 척의 배로 조선을 빠져나가려 했지. 이순신 장군은 조선을 피바다로 만들어 놓은 왜군을 한 명도 살려 보낼 수 없다며 총공격을 하여, 450여 척의 배를 격파시켰어. 이날 남해 방면으로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이순신 장군은 왼쪽 가슴에 적의 총탄을 맞고, “전쟁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하였지.
Q. 풀빵의 이름 기원이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풀빵이 처음 시작된 이유는, 바로 일제의 '공출', 즉 식량수탈 때문입니다. 원래 일본에서 먼저 유행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다이야끼(도미빵, 붕어빵의 원형)이나, '오반야끼(오방떡), 도라야끼 등의 음식은 구한말 시절부터 전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1930년대 말부터 2차대전을 치르게 되면서, 일본은 우리나라에서의 식량수탈을 엄청나게 늘립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 백성들은, 가을걷이가 막 끝나도 쌀밥은 구경을 못할 정도였죠. 결국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그야말로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쌀이나 각종 곡식들을 가루낸 다음 밥이 아니라 멀건 풀죽을 끓였습니다. 그걸로 끼니를 대신한 거죠.하지만 언제 어느 시대건, 어른들은 몰라도 철없는 어린 것들은 '맛난 것'을 찾게 마련이죠? 부모 입장에선 또 그런 아이들을, 그냥 보아 넘길수가 없는 거고요. 바로 이 때문에, 양식으로 먹을 풀죽 일부를 덜어서 어린 아이들 먹을만큼 작게, 애들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로 기름칠한 솥뚜껑 위에 반죽을 붓고 구워서 아이들을 먹였습니다. 이게 바로 '풀빵'의 시작이에요. 참고로, 이것은 일제시대에 태어나고 자라신 우리 어머니와, 시장에서 '풀빵(국화빵 아님)' 장수를 하셨던 어머니의 동갑내기 친구분이 직접 해주신 이야기 입니다.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먹을 양식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시장통에는 풀빵을 전문적으로 구워서 파는 장사치들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반죽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간식을 만들 때 쓰던 오래된 여러가지 틀들을 구해와서 사용했구요. 그러니 그 모양이 당시엔 제각각이었죠.그렇게 독립을 거치고, 6.25를 거치고, 미국이 지원해준 밀가루나 옥수수 가루 등이 대량으로 풀리면서, 그때부터 시장에는 약간이지만 흑설탕을 넣고, 손바닥만한 작은 틀을 따로 만들어서 구워내는 우리가 아는 '풀빵'이 생겨납니다. 물론 이때부터는 반죽재료가 쌀가루를 푼 풀죽이 아니라, 그 전까지는 귀해서 찾아볼 수 없던 '밀가루'로 바뀌게 되구요. 그러다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좀 더 걸쭉한 빵같은 반죽에, 국화꽃 모양을 한 틀에 구워낸 '국화빵'도 나오게 되죠.결국, 우리가 아는 '풀빵'은, 일제의 수탈 때문에 생겨나게 된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