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외국나라는 음력 달력을 보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어 사용국들은 일단 우리와 똑같은 음력을 씁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쓰는 음력은 태양태음력이라고 합니다. 왜냐면 달과 태양을 모두 계산하기 때문에 복잡하거든요.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기간은 두 가지로 나눠 이야기합니다. 지구의 태양에 대한 공전을 무시한 항성월과 공전을 고려한 삭망월이죠. 달의 모양이 변하는 주기는 삭망월에 따릅니다. 달이 뜨는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항성월입니다.지구의 공전 주기는 365.2422일이고 달의 지구에 대한 공전 주기는 29.53일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달과 해가 정해지는 것이지요. 양력은 달보다 해를 우선하는 것입니다. 1년은 일로 기준하면 365.2422일이고, 월로 기준하면 약 12.38월이 되지요. 그래서 양력은 365.2422일을 정확히 12개월로 나눈 것입니다. 4년에 하루씩 윤년이 있고요. 그런데 12.38월을 12월로 맞추려다 보니 원래 한 달 길이인 29.53일을 넘어서 30일 또는 31일이 되게 맞춘 것입니다. (2월은 예외) 그래서 날짜와 달 모양이 전혀 관련이 없게 된 거죠. 한편 한국과 중국의 태양태음력은 해보다 달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한 달 길이가 29.53일이니까 한 달은 29일 또는 30일이 됩니다. 그리고 1년이 12.38월로 되어 있으니 어떤 해는 12개월, 어떤 해는 13개월로 해서 맞추는 것입니다. 19년에 7번을 넣는 게 보통입니다. 그리고 태양-달-지구가 정확히 일직선이 되는 날을 음력 1일로 정합니다. 그러다 보면 29일인 달이 있고 30일인 달이 있는 것이죠. 정확히 일직선이 되는 때는 일반인이 알 수 없으니 며칠 뒤의 음력 날짜를 예측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1년이 13개월일 때는 윤달이 들어갑니다. 윤달을 넣는 법도 좀 복잡한데, 태양과 지구와 달의 운동을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넣는 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달과 계절이 어느 정도 맞지만 양력처럼 잘 맞진 않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24절기입니다. 24절기의 각 절기는 지구가 태양을 기준으로 해서 특정한 위치에 있는 때로 정한 거죠. 그러므로 양력 날짜가 거의 일치하는 것입니다.이슬람 음력은 태양태음력과 달리 윤달이 없습니다. 무조건 12개월이면 1년이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월과 계절이 전혀 안 맞게 됩니다. 대신 날짜 예측은 쉽습니다. 홀수달은 30일까지, 짝수달은 29일까지 있고 12월은 달의 운동에 따라서 약 3년에 한 번씩 30일까지 있고 그 외에는 29일까지 있습니다. 현대 달력은 순수 양력이고, 이슬람 달력은 순수 음력이라 계산이 편하지만 동아시아 음력은 태음태양력이기 때문에 더 복잡합니다. 대신에 자연 현상을 더 많이 반영한 것이지요.
Q. 옛날에 내시의 선발 기준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고려시대는 '제3의 성'이라 불리는 환관이 아닌, 문관들로 구성된 내시가 따로 있었다. 이들은 가문과 학식,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선발된 국왕 측근 엘리트집단이었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의 창시자인 최충(崔忠)의 손자인 최사추(崔思諏),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 주자학을 도입하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安珦) 등은 모두 학문적, 관료적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직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고려내시들은 여러 근시(近侍)들과 함께 왕의 행차에 동행하였을 뿐 아니라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경전의 강의, 왕실재정 관리를 하였으며 때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궐 밖 민정을 살피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내시가 언제, 어떠한 조직로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가장 앞선 기록은 918년(태조 1) 오늘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광평시랑 직예(職預)를 내시서기(內侍書記)로 삼았다는 『고려사』 세가 기록이다. 내시의 선발기준이 보다 분명해진 때는 11세기 문종 때이다. 재능과 공로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용모가 수려한 문인 20명을 내시로 뽑아 시종케 하였으며, 근무대가로 별사미(別賜米)를 주었다.그 후 12세기 의종 대에 이르면 귀족자제들로 구성된 좌번내시와 유신(儒臣)들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조직을 갖게된다. 그런데 국왕의 근시직이었던 만큼 내시가 되는 중요한 요건은 국왕의 총애가 우선이었다. 따라서 과거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하고, 의술, 점술, 잡기 등으로 내시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무신집권기에는 비로소 무신도 내시가 될 수 있었다.한편, 고대 갑골문자에도 보이는 환관의 존재가 우리나라 기록에서는 826년(신라 흥덕왕1)에 처음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환관이 있었으나 규모는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역할은 '왕명전달'이 아니고, 주로 궁궐 청소와 궁녀들의 관리를 맡았다. 왕의 총애를 받아 승진한다 하여도 7품까지 밖에 오를 수 없었다. 물론 의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환관 정함이 내시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환관이 내시가 될 수는 없었다.하지만 14세기 원간섭기, 출세한 환관들이 많아지고 궁궐 내 환관에 대한 역할이 늘어나자 내상시, 내시감, 내승직, 내급사 등 정2품부터 종9품에 이르는 환관들만의 부서를 갖게 되었다. 바로 1356년(공민왕 5)에 121명의 정원을 가진 내시부(內侍府)가 창설된 것이다.이처럼 고려 말 환관들만의 내시부가 만들어진 것과 반대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내시는 군 복무 대신에 들어가 궁궐을 숙위하는 성중관(成衆官)으로 위축되었다. 선발조건은 여전히 가문과 재능과 용모를 따졌지만 조선 초 1466년(세조 12) 폐지될 때까지 궁중 숙위의 기능만 가졌을 뿐이었다. (출처: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58534)조선의 내시부내시부는 환관(宦官)의 부(府)로서 왕 및 왕비전(王妃殿) 그리고 세자와 세자빈궁(世子嬪宮) 등에서 식사의 감독 · 명령의 전달 · 수문(守門) 및 청소 등을 맡았다. 정원은 140명으로 상선(尙膳, 종2품) 2명, 상온(尙춠, 정3품) 1명, 상다(尙茶) 1명, 상원(尙苑, 종9품) 등 59명만이 관직을 갖고 있었고 그 나머지는 관직이 없었다.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munwhasa/txt/text/4-3-1-2-1-1-3.html상선(尙膳) 2인 이조(吏曹)의 속아문(屬衙門) 내시부의 으뜸 벼슬이며, 임금·비빈(妃嬪)·대비(大妃)·왕세자의 식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내시부의 관원을 감독.상온(尙춠) 1인 궐내 술빚는 일을 관장 상다(尙茶) 1인 궐내 왕과 비빈등 왕족에게 차를 대접하는 일을 관장상약(尙藥) 2인 궐내 탕약을 관장상전(尙傳) 1인 왕명의 전달상책(尙冊) 3인, 궁중에서 쓰이는 서적을 관리하는 일상호(尙弧) 4인 궐내 무기창고 관장상탕(尙帑) 4인, 궁궐 재화관리상세(尙洗) 4인, 궁궐안의 왕족의 세숫물 목욕물 관장상촉(尙燭) 4인, 궁내 등불의 관리, 소화, 상훤(尙煊) 4인, 궁내 아궁이등 각 방의 난방을 관장상설(尙設) 6인, 휘장·인석(茵席)·장설(張設) 등에 관한 일 상제(尙除) 6인, 상문(尙門) 5인 궁궐 문을 지킴상경(尙更) 6인 왕의 곁에서 잡다한 시중을 든다. 야간에 시각을 알려주는 일을 함.상원(尙苑) 5인 궁중의 정원을 가꿈등입니다. 그밖에 이속으로 서원 2인과 사령 1인이 있었고요.궐내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직, 청소 등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궐내의 모든 잡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내시부 관원으로서 4품 이하는 문·무관의 근무일수에 의거하여 품계를 올려 받았으나, 3품 이상은 왕의 특지가 있어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근만(勤慢)에 대한 규찰은 승정원에서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내시부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지만, 내시의 폐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그 세력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성종 1년(1469) 내시부직은 4품을 넘지 않도록 제한한 것은 좋은 예이다. 이후로도 조선 전시기를 통하여 내시에 대한 규제론은 끊이지 않았으며 실제 내시의 세력은 미약하였다. (출처: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141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