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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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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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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홍길동전은 실화를 바탕한 소설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해번쩍 서해번쩍 정의에 사도 홍길동을 말씀하시는거라면 실화가 아니고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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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초로 만들어진 영화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먼저, 세계 최초의 영화라 하면 뤼미에르 형제(형 오귀스트(Auguste:1862~1954), 아우 루이(Louis:1869~1948))의 “열차 도착”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1895년 12월 8일, 파리의 “인도살롱”이라는 홀에서 일반 관객들을 모아 입장료를 받고 영화를 상영하였습니다.이 “열차도착”이란 영화는 씨오타 기차역에 도착하는 거대한 화물열차의 모습을 찍은 3분짜리 무성영화로 이날 “물 뿌리는 정원사”와 “전구공장 노동자들의 외출”이란 영화가 같이 상영되었습니다이 “열차도착”이란 영화는 씨오타 기차역에 도착하는 거대한 화물열차의 모습을 찍은 3분짜리 무성영화로 이날 “물 뿌리는 정원사”와 “전구공장 노동자들의 외출”이란 영화가 같이 상영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것이나 제목은 없었고 후에 내용에 따라 붙여진 제목들입니다. 이 “열차도착”이란 영화가 무성영화이긴 해도 당시 영화라는 것을 처음 접해본 관객들은 열차가 진짜로 달려오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피신하는 소동을 벌였다고도 전해집니다.이 때 뤼미에르 형제가 사용한 영사기는 라는 기계입니다.이는 카메라와 영사기를 겸한 장치로 특히, 크기가 작고 영사장치를 겸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에디슨이 내놓은 거대한 크기 때문에 “블랙 마리아”란 별명까지 붙었던 키네토폰(촬영기), 키네토스코프(영사기)보다 단연 뛰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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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계 최초의 교회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최초의 교회는 당연히 이스라엘에 있죠.^^아브라함이 세계 최초의 교회라고 할수 있고요...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곧 광야 교회로서, 세계 최초의 교회입니다.[사도행전 7:38]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또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교회가 세계 최초이고,예수님 부활 이후 제자들이 모여 있던 예루살렘이 세계 최초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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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관롱집단이 무엇을 하던곳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관롱집단의 중심은 서위(西魏) 이래 융합된 관롱호한민족 중 무력과 재지(才智)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황실 및 공신도 관롱집단의 핵심인 팔주국(八柱國)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이 당나라의 건국자인 이연(李淵)을 옹립하였다. 즉 북주를 일으킨 우문태(宇文泰)와 당나라 이연의 조부 이호(李虎)는 팔주국의 한 사람이고, 팔주국의 한 사람인 독고신(獨孤信)의 장녀는 북주 명제의 황후, 4녀는 당 고조의 어머니, 7녀는 수 문제의 황후였다. 따라서 북주·수·당은 독고신을 중심으로 혼인집단을 형성하였다.이연 집단은 태원유수의 지위를 이용한 관료집단의 성격이 강하다. 이 점에서 당조의 지배층도 수나라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연 집단을 호족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호족이란 누세동거(累世同居)로 결합한 종족의 혈연집단을 의미하기 때문에, 태원유수에 주둔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자뿐인 이연이 호족으로 성장하기란 어려웠다.이연 집단의 주축을 이루는 간부 31명 중 16명은 태원기의(太原起義)) 때의 대장군부(大將軍府) 문관인 장사(長史)·사마(司馬)·연속·참군(參軍)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후에 삼성육부와 시(寺)의 장관과 차관에 승진하였다. 14명은 이연의 장자 건성(建成)이 이끄는 좌령군대도독(左領軍大都督)과 둘째 아들 세민(世民)이 이끄는 우령군대도독 아래 도독장사·통군(統軍)·군두(軍頭) 등으로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후에 주로 무관 계통의 대관(大官)에 승진하였다. 이처럼 당조 창업 후인 무덕(武德) 연간에도 삼성육부의 장관과 차관에 수 또는 북조적인 관료와 동일한 관롱집단들이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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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족보 문화는 언제 시작된건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중국(中國)의 성씨제도(姓氏制度)라 할 수 있는 한식 씨족제도(漢式 氏族制度)를 근본으로 삼고 발전하여 정착했는데, 그 시기는 1000여년(餘年)전(前)인 신라말(新羅末)·고려(高麗)초기(初期)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옛 문헌(文獻)에 보면 고구려나 백제 계통의 성(姓)은 그 계보(系譜)가 후대(後代)와 거의 연계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신라의 종성(宗姓)과 육성(六姓)[이(李), 최(崔), 정(鄭), 설(薛), 손(孫), 배(裵)]및 가락국계(駕洛國系)의 김해김씨(金海金氏)만이 후대의 계보(系 譜)와 연결 됨을 알 수 있다. 그 이후(以後)로부터는 귀족(貴族)사이에서 가첩(家牒)이나 사보 (私報)로 기록(記錄)하여왔는데, 이러한 가계(家系) 기록(記錄)은 고려시대(高麗時代)를 거쳐 조선(朝鮮) 중기(中期)에 오면서 족보(族譜)형태를 갖추는 가승(家乘)·내외보(內外譜)· 팔고조도(八高祖圖)로 발전 하게 된다. 족보(族譜)의 발행(發行)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조선초기(朝鮮初期)인 세종 5년 (1423년)의 문화류씨 영락보(文化柳氏 永樂譜) 부터 간행되기 시작했고, 그후 1476년(성종 7년) 안동 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가 체계적인 족보형태를 갖추었으며,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족보로는 문화류씨 두번째 족보인 1562년(명종 17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嘉靖譜)이다. 이밖에 조선(朝鮮)초기(初期) 간행(刊行)된 족보(族譜)는 남양홍씨(南陽洪氏,1454), 전의이씨(全義李氏,1476), 여흥 민씨(驪興 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 成氏, 1493)등의 족보(族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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