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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소영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소영 전문가입니다.

김소영 전문가
서울시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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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축의금을 주는게 언제부터 시작된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과거의 전통 혼례는 마을 공동의 축제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지참해서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부터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892년 이화학당 학생 황몌례(黃袂禮)와 배재학당 학생 박모(某)의 혼례식이 서양식 결혼의 최초입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결혼식장은 없었기 때문에 주로 교회나 성당 등에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서양식 결혼식이 점차 보편화되면서 결혼식장 등이 들어섰고, 해방이 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그에 따라 결혼식장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결혼식장에서 결혼과 잔치를 한꺼번에 하는 방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음식 장만을 했던 풍습이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현금으로 대체하게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출처 : 파이낸셜 리뷰, 어기선 기자(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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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의 궁녀들 직급체계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궁녀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하는 말로, 나인[內人]들과 그 아래 하역(下役)을 맡은, 무수리[水賜]·각심이(방아이)·방자(房子)·의녀(醫女)·손님이라 불리는 여인들이 범주에 듭니다.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답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달랐습니다.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 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 즉, 가장 잡일을 맡았습니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았습니다. 즉, 궁녀의 격은 지밀이 가장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 올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립니다.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 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습니다.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으며,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습니다. 지밀상궁으로도 불리는 대령상궁(待令尙宮)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했고,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습니다.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 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 계급이었습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세, 침방·수방이 6∼13세,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습니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는데,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습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습니다. 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2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져서 독립 세대를 영위하게 되었습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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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불교서적에 관해서궁금 한게있어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처음으로 불교서적을 접하신다면 스님들이 쓰신 에세이를 추천합니다.법륜스님의 에세이가 대중적으로 유명하다고 생각하는데, 법륜스님의 '행복', '지금 이대로 좋다' 등이 유명하고, 전문 서적으로는 금강경 강의나 반야심경이 유명한 편입니다.또한 돌아가신 법정스님의 '무소유'도 좋은 책이라 추천드립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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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옛날 고전시대 말은 왜 지금이랑 다르고 못알아듣나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전 우리나라 말과 현대의 우리말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우선 중세~근대의 국어에는 중국의 성조와 같은 음의 높낮이가 있었습니다. 현대와는 많이 다르게 음의 높낮이가 있었으므로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으십니다.또한, 사용하는 단어 역시 현대와는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어리다'는 현재의 '어리석다'라는 뜻이지요.더불어 이중모음을 발음하는 방법이 현재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이중모음 'ㅚ'의 경우 중세 때에는 'ㅗ+ㅣ'(현재의 '오이'와 유사한 발음)로 발음했습니다.훈민정음은 조선 전기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것이므로 그 이전에는 한글이 없었지만,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발음이 다른 것은 한글의 유무 때문(이는 표기 문제)이 아니라 시대에 따른 변화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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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띄워쓰기법은?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띄어쓰기를 하는 것이 당연히 옳은 방법입니다.띄어쓰기의 단위는 단어이므로(단, 조사는 붙여씁니다.)'삼가V고인의V명복을V빕니다.'가 올바른 표기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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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인이 다 같이 찌개를 먹는 이유가 있나요? 일본이나 다른 나라는 덜어 먹더라구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는 본래 독상 문화 즉, 혼자 따로따로 각자의 상에서 먹는 문화입니다.조선시대의 풍속화에서나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흔히 나타납니다. 사극에서도 보시면 양반들이 각자의 상에서 식사를 하고, 궁궐의 모습을 담은 그림에서도 이러한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양반층뿐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적용되는 문화였습니다.오히려 일본의 나베나 스끼야끼 등 같이 먹는 음식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먹는 것이 귀해지고, 따로 독상을 차릴 여유가 없어지면서부터 일부 같이 먹는 문화가 생겨났지만, 이러한 문화는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문화입니다.궁금증을 해결하시는 데에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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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설농탕이 조선시대때 음식이 맞나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설렁탕'은 '소의 머리, 내장, 족, 무릎도가니, 뼈다귀 등을 푹 삶아서 끓인 국물에 밥을 말은 전통 음식'인데요, 이러한 설렁탕의 어원은 두 가지의 설이 있습니다.하나는 한자어 '선농단(先農壇)'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동대문 밖에는 '선농단'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신농씨(神農氏)에게 농사가 잘되라고 제사를 지내고, 비가 오도록 기우제도 지냈답니다. 성종 때에는 왕이 친히 밭을 가는 친경(親耕) 의례를 행하기도 하였답니다. 이런 의례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가마솥에 밥을 하고 소고기 국을 끓여서 먹었는데, 여기서 유래하여 이 음식을 '선농탕'이라 하였고, 지금의 '설농탕' 등의 여러 가지 음운변화를 거쳐서 '설렁탕'이 되었다는 민간어원설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몽골어 '슐렁(шөлөң)'에서 왔다는 것이다. 몽골 요리 '슐렁'은 '고기를 끓이고 밀가루를 넣어 만든 음식'인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설렁탕'이 되었다는 설로, 몽골어 사전 〈몽어유해〉에는 '고기를 삶은 물인 공탕(空湯)'을 몽골어로 '슈루'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설렁탕이 몽골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에 따른다면, 설렁탕은 고려시대 때에도 먹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려시대 때에 몽골제국과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데, 몽고풍과 고려양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때 몽골어에서 들어온 '슐렁'이 우리 국어에 차용되어서 '설렁'이 되고 여기에 '탕'이 붙어서 '설렁탕'이 되었다고 봅니다. 궁금증을 해결하시는 데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출처: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2009. 9. 16., 최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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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오뎅이라는 언어가 정확히 어느 나라 말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뎅은 일본어입니다. 실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오뎅'은 비표준어로 나와 있으며, '어묵'이 올바른 표준어입니다. 궁금증을 해결하시는 데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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