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의하여 비밀리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경운궁 환궁 전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답변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아관파천
Q.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의1904~1905년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부산 등에서 벌인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역사적 배경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를 비롯한 서방 세계는 일본 전력의 확대를 경계하였다.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일본과 가까운 부산항으로 군사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다. 1896년 5월 러시아 함대가 부산항에 입항하여 영도의 조차권을 요구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동양 함대 소속 군함 3척이 부산 영도에 상륙한 일도 있었다.1898년 1월 21일에는 러시아 함대가 영도에 상륙하여 나무를 심기위한 토지 매수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산항에서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증대되고 있었다. 양국 사이의 물리적 마찰도 현실화되고 있었다. 1899년 7월 11일 광복동에 있던 경판정(京坂亭)이라는 일본 요리점에서 러시아 해군 병사와 일본인 기생 사이의 다툼이 있었다.다음 날 일본 신문들은 러시아 병사의 폭행을 과대 보도하면서 양국 사이의 갈등이 심각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1899년 11월 5일 광복동 서양 요리점인 송천정(松川亭)에서 러시아 병사들 사이의 싸움이 일본인과 충돌로 이어졌다.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은 1899년 개항장 거류지 부지를 둘러싼 마산포 사건에서 잘 드러났다. 러시아의 남진과 이를 방어하려는 일본 사이의 대립은 이 무렵 항시 존재하고 있었다.결과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부산항에는 독립수비대 1개 중대가 주둔하고 거류민의 보호를 담당하였지만, 한국주차군이 창설되자 부산수비대는 여기에 예속되었다. 이전에 주둔중인 제12사단 제38연대 제12중대는 3월 12일 새로 온 동 사단 후비보병 제45연대의 제2중대로 교체되었다. 부산항에는 앞서 언급한 수비대 외 보수정에 군용 전신선 수비의 헌병대가 주둔하였다. 러일 전쟁 후 부산항은 일본군의 배치가 증가하였다.조선을 지배하는 일본의 권리를 방해할 세력이 사라지면서 정세가 안정되자 일본인 상인들의 조선 진출이 증가하였다. 부산의 일본인 인구는 러일 전쟁 직전 1만 명 미만에서 전쟁 이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직전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전쟁의 위험이 없어졌고, 경부선 개통과 조선 내륙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상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의의와 평가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정치적으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정치적 군사적 안정에 따라 일본인들의 조선 이주가 증가하였다. 부산의 일본인이 증가하고 부산항을 매개로 하는 무역량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부산의 일본인 지배가 안정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위한 사회 간접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답변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 )자료출처 : 부산역사문화대전 - 러일 전쟁
Q. 미국인 화가 어니반스는 어떤 인물이고 그의 작품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니 반즈1938년 출생2009년 사망미국의 화가미식축구 선수더럼(노스캐롤라이나) 출신 인물인디애나폴리스 콜츠/은퇴, 이적뉴욕 제츠/은퇴, 이적로스앤젤레스 차저스/은퇴, 이적덴버 브롱코스/은퇴, 이적미국의 화가이자 전 미식축구 선수. 독창적인 그림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으며, 당시 흑인 문화와 스포츠, 음악 등의 예체능 요소가 섞인 작품이 많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는 항상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는데, 흑인들의 고단한 삶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20세기 당시 흑인들의 탄압 등을 언급할 때 자주 언급되는 아티스트이기도하다.미식축구 선수 시절에도 볼티모어 콜츠(현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등에서 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으며, 선수 시절에도 부업으로 화가 일을 하는 등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부상으로 은퇴한 뒤에는 예술가로써 본격적으로 전향하게 된다.마빈 게이의 음반 I Want You 앨범 커버로도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 The Sugar Shack에서 위의 특징들이 잘 나타나있다. 이 작품은 만들어진 이후부터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 많은 매체에서 인용되고 있다.답변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 )자료출처 : 나무위치 - 어니 반즈
Q. 고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은 후세에 지어진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처음 사서에 등장할 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이때 고조선(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 한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하였다.고조선이란 명칭이 널리 쓰여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씨조선과 구분되는 고대의 조선이란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고조선이 포괄하는 범위에 대해서는, 서기전 2세기 초에 일종의 정변을 통해 등장한 위만조선 이전 시기에 존재한 조선만을 칭하는 경우와, 위만조선까지를 포괄해 고조선이라 하는 경우로 나누어진다.정치사적인 측면에서는 전자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위만조선의 사회와 문화가 그 앞 시기 조선과 이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면에서 고조선이라 할 경우 위만조선 시기까지를 포괄해 사용하고 있다.답변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조선
Q. 암행어사는 마패의 말을 다 쓰면 어떻게 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마패(馬牌) 마패는 관리들이 공무(公務)로 지방에 갈 때 나라의 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증표로 쓰던 패입니다. 지름이 10cm 정도인 동그란 구리 패에 말 그림이 1-10마리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전국의 주요 지역에 말을 빌릴 수 있는 역(驛)을 설치했습니다. 관리들은 역에서 역으로 이동하며 잠도 자고 말도 바꾸어 탈 수 있었습니다. 이 제도를 역참제(驛站制)라고 합니다.고려 후기 원(元)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말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이 때문에 허락받은 관리만이 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마패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처음에는 마패를 나무로 만들었지만 쉽게 부러지거나 손상되자 1434년(세종 16)에 철로 만들어 사용했고, 이후에는 구리로 만들었습니다.마패는 양면에 각각 다른 내용을새겼습니다. 한 면에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새겼는데, 이는 관리의 등급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다른 면에는 주조 일시인 ‘연호(年號)와 연월일’과 임금의 도장을 담당하는 관청인 상서원(尙瑞院)에서 이 마패를 발급했음을 증명하는 상서원인(尙書院印)이란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마패로 부릴 수 있는 말의 수는 1-10마리까지지만, 실제로는 1-3마리 정도였습니다. 암행어사의 경우도 대부분 3마리가 그려진 3마패를 썼고, 10마리가 그려진 것은 왕실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조선 초기에는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 마패를 발급했습니다. 그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중앙의 경우 왕명(王命)을 받들고 다니는 관원은 병조(兵曹)에서 증서를 받으면 상서원에서 왕에게 보고해 마패를 발급한다고 규정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觀察使) 등이 마패를 지급 받아 보고를 올리거나 진상(進上)을 하는 등 필요한 때에 말을 이용했습니다. 군사 사정으로 긴급한 경우는 쌍마(雙馬)를 이용하고 ‘긴급사(緊急事)’라는 글자를 새겨 밤낮으로 달리게 했습니다.마패를 파손한 자는 장(杖) 80, 도(徒) 2년의 형벌이나 사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1511년(중종 6) 12월의 기록에 보이는 상서원의 서리(書吏)로 근무하던 최맹손(崔孟孫)같이 마패를 도둑질해 술과 밥으로 바꾸어 먹는 경우도 간혹 있었습니다. 또 중국의 왕조가 바뀌면 대부분 연호(年號)를 바꾸었으므로 마패 또한 자주 다시 만들었습니다. 1730년(영조 6) 6월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각 지방에 160여 개, 중앙에 500여 개 등 모두 670여 개의 마패를 주조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영조 대에는 여전히 명나라 연호가 새겨진 마패를 사용하다가 청나라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영조 6년(1730) 제주 사람이 표류해 청나라에 이르렀는데, 그가 가진 마패에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가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전부터 쓰던 마패를 미처 다 교환하지 못한 것이라 해명하며 해결되었지만, 『영조실록』의 여러 기사에서 당시 한 달간의 급박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조선 후기 마패는 왕의 특명을 받고 비밀리에 민정을 살핀 임시 관직인 암행어사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암행어사는 왕에게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유척(鍮尺), 마패를 받고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봉서’는 암행할 지역과 임무가 적힌 비밀 편지이고, 『사목』은 암행어사의 할 일을 적어 놓은 책입니다. 또한 ‘유척’은 시체를 검시할 때 쓰는 자이며, ‘마패’는 역에서 말을 빌리거나 역졸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증명하는 패입니다.암행어사에게 발급하는 마패는 왕과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숙종과 영조는 3마패를, 고종은 주로 2마패를 주었습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암행어사에게 상등마(上等馬) 1필, 중등마(中等馬) 1필과 짐을 나르는 태마(駄馬) 1필을 주도록 규정해 놓았습니다. 암행어사는 관리 중 품계가 높지 않은 당하관(堂下官)이었지만, 임무의 특성상 고관(高官)만이 타는 상등마를 탈 수 있었습니다.답변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 )자료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Q. 삼국지에 나오는 계륵이라는 표현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답변드리겠습니다.계륵(鷄肋)은 고사성어로 한국어로 그대로 풀어보면 '닭의 갈비'라는 뜻이다.실생활에서는 큰 쓰임이나 이익은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상황, 물건을 나타낸다.참고로 계륵의 유래는《후한서》의 〈양수전〉에서 처음 나온 용어이다. 당시 위나라의 승상 조조는 촉나라의 군주 유비와 한중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진격하는지 퇴각하는지에 관해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늦은 밤 암호를 정하기 위해 찾아온 하후돈(夏侯惇)에게 조조는 단지 계륵이라고만 할 뿐 다른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후돈은 돌아가 장수들과 계륵이 무슨 뜻인지 서로 이야기하였으나 아무도 영문을 알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조조의 부하중 한 명이었던 양수는 곧바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장수들이 의아해 하는 가운데, 양수는 "닭갈비는 먹을만한 살은 없지만 그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부위이다. 결국 이 장소를 버리기는 아깝지만 대단한 땅은 아니라는 뜻이니 버리고 돌아갈 결정이 내릴 예정이다(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라고 언급하였다. 조조는 이튿날 한중 땅에서 철수 명령을 내렸다.《삼국지연의》에는 이러한 뜻을 간파한 양수를 시기한 조조는 군율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양수를 참형에 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연의》에서는 한중에서의 전투에서 조조군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조조는 철수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그 날 저녁 식사로 닭고깃국이 나왔고, 사발에 담긴 닭의 갈비를 보며 조조가 당시 상황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 후 암호를 정할 때 '계륵이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²계륵이라는 것은 한중이라는 땅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당시 조조가 처한 상황으로 보는게 낫다. 유비의 공격에 한중을 지키기 힘들었고 그렇기에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다.답변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 )자료출처 : 위키백과 - 계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