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피사의 사탑 원래 사용 목적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피사의 사탑은 원래 피사 대성당의 부속건물로서, 종을 울려 성당의 예배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또한 피사 대성당은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피사 공화국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성당이었습니다.하지만 건설 진행 도중에 뒤늦게 기초 지층의 부실, 지반의 불안정함을 발견했지만 사탑이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때문에 건설 작업이 중단되었습니다.하지만 이렇게 기울어진 것이 더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Q. 고려의 과거제도와 조선의 과거제도는 많이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1. 무과의 유무: 고려시대에는 무과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는 무과가 도입되어 무신을 선발하였습니다. 이는 군사적 필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조선의 안보와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무과는 군사적 능력과 무예를 평가하여 유능한 무신을 선발하였으며, 이는 국가의 군사적 안정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2.승과의 존재: 고려시대에는 승과가 있어 불교 승려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렀으나, 조선시대에는 승과가 폐지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삼고 불교를 억제한 정책을 반영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의 주요 종교로 자리 잡고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국교로 확립되면서 불교의 영향력이 감소하였습니다.3.시험 단계와 방식: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고려시대보다 더욱 체계화되고 복잡한 시험 단계를 거쳤습니다. 조선의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의 세 단계를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였으며, 이는 시험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절차를 따랐으나, 조선시대에는 더욱 체계적인 시험 절차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습니다.4.기술직 선발: 조선시대에는 잡과를 통해 의학, 역학, 법률 등 다양한 기술직 관리를 선발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잡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조선시대가 다양한 분야의 전문 인재를 체계적으로 선발하여 국가의 행정 능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잡과는 실용적인 지식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여, 국가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Q. 중세시대는 왜 암흑시대라고 불리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중세(5세기~15세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1. 로마 제국 붕괴 이후의 혼란5세기경 서유럽의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하면서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무너지고, 봉건제도가 등장하며 작은 영주들이 각각의 땅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무역과 경제가 쇠퇴하고 도시가 붕괴, 사람들은 작은 농촌 공동체에서 자급자족하며 살게 되었습니다.2. 학문과 문화의 쇠퇴고대 로마와 그리스 시대의 철학, 과학, 문학, 예술 등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교육이 사라지고 문맹률이 급증했으며, 지식의 전수가 어려워졌습니다. 학문은 주로 교회(수도원)에서만 보존되었고, 종교적 교리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3. 종교의 절대적 지배기독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교회가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장악했습니다. 과학적 사고보다는 신앙과 미신이 우선시되었으며, 교회에 반하는 학문이나 사상은 탄압을 받았습니다.또한 이단 심문, 마녀사냥 등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습니다.4. 전쟁과 질병, 낮은 삶의 질봉건제 사회에서 영주들 간의 끊임없는 전쟁(십자군 전쟁, 백년전쟁 등)이 발생했습니다. 14세기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1/3~1/2이 사망하는 등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으나, 기술 발전이 더뎌 기근과 가난이 지속되었습니다.
Q.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당시 어쩔수 없던걸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네 맞습니다.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정책을 펼쳤으며 전쟁 이후 후금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관리했다는 것이 중립외교론의 주요 논리입니다.하지만 이를 재검토해보면, 광해군이 처음부터 능동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수동적으로 대응한 것에 가깝다는 점이 보입니다.광해군은 처음부터 명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1만 이상의 조선군을 사르후 전투에 파병했지만, 명·조선 연합군이 대패하면서 조선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이후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후금에 항복했다고 전해지지만, 당시 전황을 보면 이는 전투에서 대패한 뒤 잔여 병력이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결정일 가능성이 큽니다.즉, 광해군이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외교를 설계한 것이 아니라, 패배 이후 후금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피해 통제 전략이 중립외교로 해석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