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유럽 전쟁이나 역사 보면 유대인 이라고 나와있는데 유대인은 정확히 어떤사람을 지칭하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기원을 알아봐야 해요. 유대인의 역사는 고대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민족은 히브리인으로 불렸으며, 성경 속 이야기에서는 아브라함이 이 민족의 시조로 나와요.아브라함은 신의 부름을 받아 새로운 땅,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죠 이때부터 유대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후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지도 하에 탈출을 하고, 십계명을 받으면서 그들만의 종교적 신념을 확립해요.바로 이때, 유대교의 기반이 만들어졌고, 그들은 자신들을 '신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믿기 시작했어요. 이 시점부터 유대인들의 역사와 종교가 밀접하게 연결되습니다.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주로 유다 왕국에서 유래해요. 고대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나뉘었을때, 남쪽에 위치한 유다 왕국은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이때부터 '유다'에서 파생된 '유대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어요.이후 여러 제국들의 침략과 정복을 겪으며, 유대인들은 왕국을 잃고 전 세계로 흡어졌지만,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면서 유대인으로 남게 되었죠.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정복 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고향을 떠나야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으로 설명돼요.디아스포라는 '흩어진 민족'을 뜻하는데, 유대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나라로 흡어지며 정착하게 된 현상을 나타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며, 유대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해왔습니다.
Q. 백년전쟁의 주요 전개 과정은 어떠했으며, 이 전쟁이 프랑스와 영국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백년전쟁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제1기(1337-1360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영국군이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며 프랑스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제2기(1369-1453년):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반격을 시작하여 영국군을 물리쳤습니다.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유행하여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제3기(1419-1450년): 영국의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정복하고, 프랑스 왕 샤를 6세와 협상하여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백년전쟁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프랑스의 승리: 1453년 영국군이 프랑스의 카스티용 전투에서 패배하여 백년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영토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영국과 프랑스의 변화: 백년 전쟁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는 봉건제가 약화되고,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유럽의 세력 균형 변화: 백년 전쟁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이 변화하여, 프랑스가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Q. 유학은 왜 유학을 제외한 공업이나 상업을 천시했던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유교에서는 군주와 지배계급이거의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할 것이 요구되고 국가의 정치도 그런 방향으로 행하여야 한다는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이런 물질 경시의 사상이 정책 면에서는 농업을 기본으로 여기고 상공업을 누르는 이른바 농본억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유교사회에서는 상공업이 다른 분야보다도 천시되고 억압되었습니다. 특히, 상업은 농업과 달라서 이윤을 추구하는 비윤리적인 업으로 생각되었으며 상업과 상인에 대한 천대와 억압은 단순히 사상적.감정적으로, 경제상으로 폭넓게 가해졌었습니다. 이것은 대내적으로는 상품의 유통을 저해하고, 나아가서 상품의 생산을 위축시켰고, 생산 기술의 발전을 막았으며, 대외적으로는무역이 침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Q.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은 무엇이며, 이 전쟁이 끝난 후 유럽에서 생긴 주요 변화는 무엇인가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제1차 세계대전은 우선, 제국주의적 경쟁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착취하며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욕망은 국가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특히 독일, 영국,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또한, 군비 경쟁도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각국들은 군사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였고, 이로 인해 전쟁 발발 시 즉각적인 군사적 대응이 가능해졌습니다. 특히 독일은 해군력을 강화하며 영국과의 군비 경쟁을 촉발시켰고, 이는 두 나라 간의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더불어, 비밀 동맹 체계의 형성도 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 동맹과 프랑스, 러시아, 영국으로 이루어진 삼국 협상은 서로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며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제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나타난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첫째,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 피해는 유럽 사회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약 1천만 명이 전사하고 수천만 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전후 유럽은 인구 감소와 심각한 사회적 불안정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둘째, 전쟁은 국제 정치 지형을 변화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대한 가혹한 배상금과 군사적 제한을 부과하여 독일 내에서 강한 반발을 일으켰고, 이는 후에 제2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되는 정치적 불만으로 이어졌습니다.셋째, 제1차 세계대전은 국제 사회의 협력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후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으나, 이 역시 강대국들의 협력이 부족하여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Q. 구석기 시대의 주거지는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구석기 시대에는 채집,수렵,어로를 하면서 이동생활을 했으므로 동굴이나 토굴에서 주로 살다가 발달된 형태로 막집을 지어 거주했습니다.충남 공주군 석장리 유적, 함경북도의 동광진이나 굴포리,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등이 있다는데, 석장리의 후기 구석기의 주거지는 기둥자리, 화덕 자리, 담자리가 있어 당시에 기둥을 세워서 만든 막집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이 집터는 동서 7.5m, 남북 7m정도로 3,4∼10명의 가족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구석기 시대의 집자리 유적은 구석기인이 집단적으로 음식물을 찾아 이동하는 무리 사회로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