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예송 논쟁이 발생과 경과를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예송논쟁은 17세기 중반, 즉 효종(孝宗)과 그의 후계자인 현종(顯宗) 시대에 발생했습니다. 이 시기는 조선 사회가 성리학적 가치관을 중시하며, 유교적 예절과 규범이 더욱 강조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왕실의 제사와 장례식에 대한 관습과 규정을 두고 상반된 의견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예송논쟁은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첫 번째 예송(1659): 효종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부 유학자들은 효종의 장례식에서 그의 어머니인 인선왕후의 예를 따르자는 주장을 했고, 다른 유학자들은 이전 왕의 제사 규범을 따르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1년 상복'과 '3년 상복'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습니다.두 번째 예송(1674): 현종의 장례와 관련하여 다시 한번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이때는 더욱 격렬해졌으며, 왕실의 권위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얽히게 되었습니다. 각 진영은 자신이 지지하는 유학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장례 예법을 주장하였고, 이는 정치적 세력 간의 갈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Q. 고국천왕의 업적에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고국천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그 중 하나는 왕위를 계승하는 방법을 바꾼 것인데, 그전까지는 고구려의 왕위가 형제들 사이에서 전해졌지만, 고국천왕은 자신의 아들에게왕위를 물려주었어요.이것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중요한 변화였는데,아들이 왕위를 잇게 되면서 왕권이 더 강해지고, 왕족 간의 다툼도 줄어들었습니다.또한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는 제도인 진대법을 실시하였습니다.농사가 잘 안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백성들에게곡식을 빌려주고, 나중에 갚도록 한 거예요.이 제도를 통해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고구려는 더욱 안정된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Q. 제주도 4.3사건..1948.3월에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제주4·3사건을 간단히 요약하면,당시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이 겹친데가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고, 군정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이 사건의 희생자 통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2만 500~3만 명으로 잠정 추정하였습니다. 한편, 군인 전사자는 180명 내외, 경찰 전사자는 140명이며, 당시 희생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