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러시아의 표트르대제도그렇고 프리드리히대제를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닮은 구석이 많은 왕입니다.프리드리히 2세(1712년~1786년, 재위 1740년~1786년)는 왕자 시절, 군사 문화가 발달한 독일 문화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는 문학 소년처럼 프랑스 문화에 푹 빠져살아서 그 때문에 아들이 강력한 군인 황제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부터 자주 혼나곤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결국 독일 밖으로 도망을 갔고, 화가 난 아버지는 사형선고를 내렸을 정도였습니다.반면 표트르 대제(1672년~1725년, 재위 1682년~1725년)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전혀 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 그는 후궁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래서 어린 시절 궁궐에서 쫓겨나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왕이 된 후 둘의 행적은 비슷한데, 바로 팽창정책을 펼친 것입니다.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이 되자 확 바뀌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군인 황제가 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1748년)을 이용해 경제 요충지인 슐레지엔을 합병했고, 7년전쟁(1756년~1763년)에도 뛰어들었습니다.표트르 대제는 군사 요충지인 터키의 아조프를 공격해 차지했고, 1700년에는 스웨덴과 북방전쟁(1700년~1721년)을 벌여 유럽 북부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 원로원이 그에게 대제라는 칭호를 선사했단다고 합니다.또한 두 왕은 대표적인 계몽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은 국민의 머슴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국민을 계몽하고 교육을 확대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의 우수한 문물을 배우기 위한 사절단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신분을 숨기고 공장 직공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술과 포술 등 우수한 군사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런 두 왕의 노력으로 두 나라는 열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Q. 7년전쟁때 독일나라중 바바리아.뷔르뎀베르크가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해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을 말합니다.이 전쟁 시기인 1759년 11월 30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프랑스군과 합세하려던 뷔르템베르크군과 전투가 벌어지게 되고, 뷔르템베르크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국 방비에 전념하느라 프랑스군과 합류하지 못하게 됩니다.이후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여제는 친 프랑스적 인물이었기에 프랑스의 편에서 7년 전쟁에 가담했지만, 도중에 사망하고 오히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숭배하는 표토르 3세가 즉위해버립니다.당연히 러시아 군대는 철수하고, 프로이센과 강화를 다시 체결하였죠.따라서 프로이센에게 천운이 따르며 7년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고, 이후 프로이센이 독일 지역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