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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역사 전문가입니다.

이동광 전문가
카이로스 아카데미
Q.  신성로마제국은 왜 중앙집권제국으로 발전을 못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신성로마제국이 중앙집권적인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우선, 신성로마제국은 10세기 오토 1세가 제국을 재건한 이후에도 사실상 여러 독립적인 영주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가까웠습니다. 제국의 황제는 명목상으로는 전체 제국의 통치자였지만, 실제로는 제후들과 교회 세력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습니다. 각 지역의 제후들은 자신들의 군대, 조세권, 법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의 권한을 인정하면서도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또한, 황제가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체제였다는 점도 중앙집권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일곱 명의 선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치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따라서 황제는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기보다는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타협과 양보를 반복해야 했습니다.종교적인 요인도 중앙집권화를 막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어진 교황과 황제 사이의 권력 투쟁, 즉 서임권 분쟁은 황제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시켰습니다. 이 갈등으로 인해 황제는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켰고, 교회는 오히려 각 지역에서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이 외에도 지리적인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이탈리아 북부 등 다양한 민족과 언어, 지역적 전통을 가진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중앙 정부가 이를 모두 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Q.  삼국지 여포 최후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여포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웅으로, 뛰어난 무력과 기세로 이름을 떨쳤으나, 변덕스럽고 배신이 잦은 성격으로 인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여포는 원래 동탁의 휘하에 있었지만, 동탁을 살해하고 스스로 권력을 잡으려 했습니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잃었습니다. 특히 조조와 유비가 손을 잡고 여포를 공격하면서 그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서기 198년, 여포는 하비성에서 조조의 대군에게 포위당했고, 유비의 협력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포의 부하였던 송헌과 위속이 그를 배신하고 여포를 결박하여 조조에게 넘겼습니다.조조는 처음에는 여포를 살려둘까 망설였지만, 유비가 여포의 배신 습성을 지적하며 “그를 풀어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조언하자, 조조는 마음을 바꾸어 여포를 처형하기로 했습니다. 여포는 마지막까지 조조에게 항복을 요청하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결국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이처럼 여포는 뛰어난 장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의를 저버리는 정치적 선택과 인물 간의 신뢰를 무너뜨린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Q.  미국에서 남북전쟁을 기념하는 메모리얼데이도 사회적 논란이 잇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메모리얼 데이는 남북전쟁 이후 생겨난 추모 문화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기원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인 논란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1868년 북부의 미군 참전용사 단체가 주도하여 “데코레이션 데이(Decoration Day)”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남부와 흑인 공동체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추모 행사를 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특히 1865년 남북전쟁 직후,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서는 해방된 흑인들이 연방군 사망자들을 위한 추모 행사를 벌였다는 기록이 최근 학계에서 조명되며, 메모리얼 데이의 흑인 기원설이 사회적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또한, 남부군 장병 추모 문제도 논란입니다. 메모리얼 데이는 본래 연방군(북부군)을 기리는 데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부 지역에서는 남부군 전사자까지 포함하여 기념하는 움직임이 생겼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는 역사 화해의 상징이라 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를 추모하는 것은 인종차별과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남부 주 일부에서는 별도의 '컨페더레이트 메모리얼 데이를 따로 기념하는 일도 있어, 미국 사회의 역사 인식의 분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집니다.
Q.  과거 영국과 프랑스는 남북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실제로는 남부에 일정한 호의적인 시각을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 모두 남부의 면화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부는 세계 주요 면화 공급지였고, 특히 영국의 방직 산업은 남부 면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가 북부로부터 독립할 경우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상류층은 북부의 공화주의적 이상보다는, 남부의 귀족적인 사회 구조나 자유무역 지향적 경제체제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남부를 교전국으로 간주하여 해상에서 일정한 외교적 지위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는 남부가 외교적으로 독립국은 아니지만, 교전 당사자로서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하지만 본격적으로 남부를 국가로 승인하거나 군사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첫째, 북부가 전쟁의 정당성을 ‘노예제 폐지’라는 도덕적 명분으로 전환하면서, 특히 링컨이 1863년 발표한 노예해방선언 이후, 유럽의 여론은 노예제를 유지하는 남부보다는 도덕적 우위를 가진 북부에 우호적으로 기울었습니다.둘째, 북부는 해군력을 동원해 남부의 항구를 봉쇄하며 유럽으로의 면화 수출을 차단했고,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도 남부와의 경제적 연계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셋째, 미국과의 무력 충돌이 자국에 미칠 부정적 파장을 우려해,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회피하였습니다.결론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남북전쟁 초기에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남부에 일정한 우호적 태도를 보였지만, 북부의 도덕적 명분 강화와 전황의 흐름, 국제 여론, 자국의 국익을 고려해 직접적인 개입은 피하고 외교적 중립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는 미국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Q.  훈련도감이 임진왜란 때 설치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기존의 군사 제도로는 일본군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당시 조선의 군대는 평상시에는 해산되고, 전시가 되어야 모집되는 의용 중심의 지방 군대(속오군)였으며, 무기의 활용도나 전투 훈련도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조총을 주력 무기로 사용하는 일본군에 비해 조선군은 실전 경험이 적고 조직적 훈련이 부족하여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이에 따라 선조 정부는 전란 중에도 전투에 능한 정예 병력을 상시적으로 유지하고, 조총 등 신식 무기에 익숙한 군인을 양성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임진왜란 직후 1593년(선조 26년), 삼수병(포수, 사수, 살수)으로 구성된 상비군 조직인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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