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강화도 조약 이후에 일본과 추가적으로 체결한 조약이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과 다음과 같은 추가 조약들을 체결하였습니다.첫째, 조일 수호 조규 부록(1876년)과 무역 규칙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부록과 규칙은 본 조약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서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항구 주변 10리 이내에서의 자유무역을 허용하고, 양국의 화폐를 통용하게 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본격화할 수 있었습니다.둘째, 조일 통상 장정(1876년 체결)이 있습니다. 초기 통상 장정은 일본 상인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체결되었으며, 관세를 없애거나 일본 상품에 대한 내국세 면제 등 불평등한 요소가 많았습니다. 이후 1883년에는 조선 정부가 이를 개정해 관세를 설정하고, 내지(內地) 통상 금지를 명문화했지만, 여전히 일본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셋째, 조일 수호 조규 속약(1882년)도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하고, 손해 배상금을 조선이 지불하도록 한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 내에서의 정치적 발언권과 군사적 개입 명분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Q. 중국은 왜 예전부터 하나의 중국이고 모든 문화의 발상이나 시초를 자기것이라 우기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중국은 오랜 역사 동안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는 중심적 세계관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는 자신들을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여기며, 주변 민족과 문화를 ‘변방’이나 ‘오랑캐’로 보는 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 왕조들이 천하를 다스린다는 ‘천하관(天下觀)’과도 연결되며, 자연스럽게 중국 내부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괄하면서도 중심화하려는 경향을 강화시켰습니다.근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관점은 정치적인 목적과 결합되었습니다. 특히 청나라의 멸망 이후 혼란기를 거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중국은 통일과 국토 보전을 핵심 국가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은 자국 내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이나 타이완, 티베트, 신장 문제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과거 역사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영토와 문화를 모두 중국의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통일된 중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또한, 고대 동아시아의 다양한 문명, 예를 들어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과 같은 한반도나 만주 지역의 고대 국가들을 중국사 안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동북공정과 같은 국가적 역사 재구성을 통해 실현되며,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모든 것의 기원’이라는 인식을 대내외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결국, 중국이 과거부터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고 모든 문화의 기원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경향은 자국 중심의 역사관, 민족 통합과 영토 보전을 위한 정치 전략, 그리고 국제적 영향력 확대라는 목적이 서로 얽혀 있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Q. 안녕하세요 조선 말기 인물인 민영환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맞습니다. 긍정적인 평가가 많습니다.민영환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습니다:그는 서구 열강을 순방하면서 헌정 체제와 민주주의, 근대적 군사 제도 등 새로운 정치 모델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의 개혁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귀국 후 고종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백성의 권리 신장과 국가의 자주적 개혁을 주장하며 근대적 국가 체제를 도입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습니다.또한 민영환은 외교관으로서 미국, 유럽, 러시아 등을 상대로 외교 업무를 수행하며 국제 감각과 시야를 키운 인물입니다. 그는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외교 전략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조국의 자주성을 외부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Q.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의 전개과정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약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요동 지역으로 진군했습니다. 당군은 먼저 요동성과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고구려를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던 안시성을 공격 목표로 삼고 포위 작전에 돌입했습니다.안시성의 성주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지만, 용감하고 지혜로운 지휘로 병사들과 함께 완강하게 항전했습니다. 당군은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전투가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병참선이 길어지고 군사들의 피로도 심해졌습니다.이에 당 태종은 성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거대한 토산(土山), 즉 인공 언덕을 쌓아 성벽보다 높은 곳에서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수개월에 걸쳐 흙과 돌을 동원해 토산을 완성했으나, 고구려 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야간 기습을 통해 토산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전세는 점점 고구려 쪽으로 기울었고, 장기 포위로 인해 당군 내부에서 식량 부족과 질병이 발생하면서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습니다. 더불어 고구려의 대규모 지원군이 도착한다는 첩보까지 전해지자, 당 태종은 결국 안시성 함락을 포기하고 철군을 결정합니다.
Q. 부여가 왕권이 약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부여가 왕권이 약했던 이유는 귀족 중심의 권력 구조와 분권적인 정치 체계 때문입니다. 부여는 여러 마가, 우가, 구가, 저가 등의 유력한 귀족 집단이 지역을 분할하여 다스리는 연맹 왕국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들 가(加)들은 각자 독립적인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왕은 그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즉, 부여 왕은 국가 전체를 강력하게 통치하는 중앙 권력이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는 존재에 가까웠습니다.또한 부여 사회는 형벌과 재판 제도가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국왕의 권위는 종교적 신성성보다는 세속적인 연맹 우두머리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 때문에 왕권이 신성시되지 않아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기 어려웠고,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중요한 정책이나 전쟁조차 주도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이처럼 부여는 중앙집권적 정치 구조가 미약하고, 유력 귀족 세력이 분산되어 있는 분권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이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