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내전중인 국가는 무슨 나라가 있고 왜 일어나고 있어요?
현재 내전 중인 나라는 시리아기 대표적입니다. 2011년 이랍의 봄 이후 내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부군, 반군, 외국 세력이 얽혀 인도적 위기가 심각하며, 정치적 혼란과 경제 붕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단은 2023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군벌 간 충돌이 격화되었습니다. 예멘은 후티 반군과 정부군, 사우디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하여 내전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미얀마는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민주화 세력과 군부 간 내전으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콩고민주공화국,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말리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무장 단체, 부족, 정부간 내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Q. 게르만족 국가인 프랑크왕국과 동고트족은 어떻게 서로 연관성을 갖고 영향을 서로 주나요?
두 집단 모두 게르만족의 일파입니다. 이들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전후 유럽 각지에 왕국을 세웠습니다. 특히 프랑크족은 갈리아 지역에 프랑크 왕국을 세웠으며,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을 수립했습니다.두 세력은 모두 로마 제국 붕괴 후 권력 공백을 이용하였으며, 로마 문화를 수용하여 계승하였습니다. 특히 프랑크 왕국은 정통 가톨릭인 아타나시우스파를 수용하였으나 동고트는 이를 거부하면서 가톨릭과 마찷이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점차 서유럽의 패권을 장악했고,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제국(비잔티움)과의 전쟁 끝에 멸망했습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이 서로마제국의 계승자 역할을 하며 중세 유럽 질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Q. 중세유럽의 바이킹족과 게으만족은 어떤 연관성과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쳤나요?
바이킹족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북게르만족에 해당됩니다. 즉 이들은 게르만족의 한 갈래로 중세 유럽에서 활동한 북유럽계 게르만족입니다. 이들의 언어인 바이킹 언어는 게르만어군에 속하며, 신화와 문화에서도 게르만족과 많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바이킹족은 8~11세기 동안 유럽 각지(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를 침략·정복·무역하며, 게르만족이 이미 세운 왕국들과 충돌하거나 융합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이킹 후손인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를 정복해 앵글로색슨(서게르만족)과 융합,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했습니다. 바이킹은 북유럽의 게르만 문화와 기술을 유럽 전역에 전파하엿으며, 정치적으로 방어 체계, 정치 구조, 귀족 계급 형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Q. 나치 독일이 게르만족을 이상화한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나치 독일이 게르만족을 이상화한 이유는 정치적, 이념적 목적때문입니다. 나치는 독일은 '아리안 인종'의 가장 순수한 후예로 규정하고 게르만족을 인종 게층의 최상위로 우월하다고 여겼습니다.나치는 이를 통해 국민 자긍심과 민족 통합 의식을 강화하고, 사회 내부의 결속을 다지려 했습니다. 또한 나치는 게르만족의 신화와 전설, '피와 대지' 개념을 활용해 과거 영광과 도덕성을 이상화함으로써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정체성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인종적 우월성 주장은 유대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제, 나치 인종 정책의 정당화 근거가 되었습니다.
Q. 역사적으로 시민들이 활동 하지 않았던 운동도 있었을까요?
현대사에서 민주화 운동은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 등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례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거 왕조 시대에는 대부분 정치적 운동이나 반란이 양반, 관료, 혹은 군인 등 특수 계층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부 운동은 종교 지도자,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 여성 등이 사회, 경제적 운동과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제재로 활동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Q. 로마제국의 긴 역사 속에서, 글레디에이터가 존재했던 시기와 이유는?
글레디에이터는 고대 로마에서 무기(글라디우스)를 들고 경기장에서 서로 혹은 맹수와 싸운던 검투사를 의미합니다. 글레이디에터는 로마 공화정 말기부터 제정 전성기에 이르는 시기에 존재했습니다. 팍스로마나 시기에 로마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안정 식에 대규모 콜로세움 경기와 같은 오락문화가 발전했습니다.황제와 권력자들은 글레디에이터 경기를 통해 임심을 달랬고 인기를 얻으며, ㅈ어치적 불만을 잠재우는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원래는 전쟁 포로나 범죄자, 노예들이 경기에 참여해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의식적 의미도 있었으나 점차 시민 오락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거대한 콜로세움에서 시민들이 함께 경기를 관람하며 로마의 사회적 통합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