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제 1차 ~ 4차까지 교육령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질문의 요지가 일제강점기 조선교육령으로 파악됩니다. 일제강점기 1차 조선교육령은 1911년 식민지 초기 조선인을 일본에 충성하는 식민지 노예를 양성하기 위해 보통교육과 실업 교육 중심으로 차별 교육 체제를 만든 것입니다.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은 3.1운동 이후 일제가 이른바 식민지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학교 수를 늘리고, 보통교육의 수업 연한을 6년으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어 중심이고 차별교육을 지속하고 민족 교육을 억제하였습니다. 그리고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은 중일 전쟁 이후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고, 조선어 교육을 수의교과로 하여 사실상 폐지하였으며, 보통학교의 명칭도 심상소학교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1943년 4차 조선교육령은 군사 훈련에 집중하여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하고,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Q. 프랑스 나폴레옹의 등장 배경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중 혼란한 시기에 등장한 영웅입니다. 프랑스는 왕정 붕괴와 혁명 정부 혼란, 급진파와 온건파의 권력 다툼, 경제 불안, 대프랑스 동맹군의 침입 등 사회, 경제적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이 과정에서 귀족 장교들이 대거 망명하여 군 내부에 공백이 생겼으며, 혁명 전쟁이 계속되면서 유능한 젊은 장교들의 발탁이 활발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 귀족이었으나 포병 장교로 툴룽 전투 이후 혁혁한 공을 세우며 단기간에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는 1799년 총재정부의 무능과 불안정과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하자 쿠데타를 통해 제1 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Q. 이 시대의 한 사람의 현인이라고 할정도로 검소하고, 겸손하며, 꾸준하게 내적외적 성장하는 워렌버핏은 최초에 어떤 상황과 환경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훌륭한 모습으로 남게 되셨는지 궁금합니
워렌 버핏이 이 시대 현인이라 불릴 만큼 검소함, 배려, 열린 마인드, 도전 정신을 꾸준히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가정 환경 덕분입니다. 그는 가족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정직과 근면, 검소함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특히 6살 때부터 코카콜락, 껌, 신문을 팔며 사업 감각을 키웠으며, 11살에 주식 투자를 시작하며 돈의 원리를 체득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시절 가치투자의 대가 벤저민 그레이엄에게서 직접 배워 투자 철학을 확립하였으며, 평소 검소한 생활과 꾸준한 자기 계발을 통해 평생을 일관되게 살아왔습니다. 이런 자세가 워렌 버핏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Q. 우리나라 건국이래 가장 크게 경제가 발전한 시기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인가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발전한 시기는 1962년부터 추진한 경제 개발 계획 시작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로 평가됩니다. 특히 1970~1980년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고도성장이 집중된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중화학 공업으로 산업 동력을 전환하고, 전자, 자동차, 조선 공업이 집중되었으며 산업 인프라가 구축된 시기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개발 계획 시작 직전인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가 1979년 1636달러로 20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1995년에는 1만달러가 넘어갔습니다.
Q. 윤석열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에서 굽신 외교를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윤석열 정부는 대일외교에서 굽신외교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과거사, 경제 안보 등 현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일본에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를 신속히 매듭짓고 미래지향적 협력, 안보 공조(특히 미국과의 3각 협력) 강화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과거사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나 책임 인정 없이 한국이 먼저 양보하는 모습이 반복되면서 위안부, 강제 징용 피해자와 시민 사회 단체 등이 저자세, 굴율적 외교라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Q. 정명사상과 병자호란의 관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정명사상은 조선이 명나라를 정통 중화로 섬기며, 명에 대한 의리와 사대를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았던 사상입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 왜군을 격퇴한 재조지은의 은혜에 감사하는 숭명의식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러나 1636년 후금이 청으로 개명하고, 조선에 사대를 요구해 왔습니다. 당시 조선은 정명사상을 바탕으로 서인의 김상헌, 정온 등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척화파와 최명길 등 남인들은 현실적으로 전쟁 지속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백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청과 화친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서인은 정명사상에 기반한 척화파가 사대 요구를 거부하면서 병자호란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