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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을 함께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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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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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시대에 백두산이 화산폭발을 했다는데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두산의 화산 폭발 시기는 과거 고려시대인 939년에 한번의 조짐을 보였다가 946년~947년 경에 본격적으로 폭발하여 화산폭발지수 7에 해당하는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며, 폭발로 인해 분출된 쇄설물의 양이 83~117세제곱킬로미터는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947년 이후 총 16회의 화산분화 기록이 발견되었으며, 폼페이 멸망에 기인한 벳비오 화산의 100배, 아이슬란드 화산의 1000배에 달하는 강한 폭발이었다고 합니다.[기상청블로그 2019.2.12 참조]해당 기록은 우리 기록으로는 , 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의 한 사찰에서 발견된 연대기의 내용 중에서 ‘하얀 잿가루가 눈처럼 내렸다’는 946년 11월 3일의 기록이 있고, 당시 화산재가 일본까지 날아간 사실도 일본 지질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고 합니다. 피해규모는 정확히는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당시 폭발에 의해 백두산 천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북한 / 미국 / 영국의 과학자로 구성되어진 공동연구진의 백두산 암석 분석 연구 결과에 따르면, 1815년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화산 폭발의 규모보다 컸고, 공기 중으로 방출된 황의 양은 4500만톤, 화산재는 상공으로 500km 솟은 뒤 반경 600km 지역을 3일 동안 뒤덮었으며, 약 8만명이 사망하고 지구의 기온을 1도 정도 낮췄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듬해 미국과 유럽까지도 여름이 오지 않아 곡물생산에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그리고 또 한 가지 제기되었던 가설로는 당시 백두산 폭발과 발해의 멸망과도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거란의 요사에서는 발해를 공격한 지 10일만에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있지만, 그것은 100%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역사에 의하면 발해가 멸망하였다고 하는 해인 926년 이후 93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일본에 발해의 사신이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에도 934년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거란의 요사가 이후 400년이나 이후에 기록되었기에 그 연대가 정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발해가 고구려인, 거란, 말갈의 다민족국가였기에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는 보이고 그로 인해 혼란의 틈을 타 거란이 침입하여 도성을 함락시켰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거란의 태조인 야율아보기는 정복 후 땅을 차지하지 않았고, 돌아오다 사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침입하여 오랜 전쟁을 했다고 볼 수 있고, 결국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고려에 투항했던 934년에 지도층들이 완전 분열된 것으로 보이고, 이후 얼마지 않아 백두산이 폭발하면서 국가가 와해되어 최종적으로 멸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멸망의 주 원인이 백두산 폭발은 아니었겠지만, 마지막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는 사안이라고 봅니다. 이후로도 1413, 1597, 1668, 1702, 1898, 1903년에 분화했다고 Vocano Discovery 분화기록에 나와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도 백두산 아래에 존재하고 있는 마그마의 양은 1256제곱킬로미터로 서울시 면적의 2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백두산이 폭발하게 되면....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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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발전이 되어지는 중일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인문학자이자 역사학자 중에 유발 하리리가 있습니다. 그는 인류를 위협하는 3가지 요소로서 1. 세계 대전과 핵전쟁 2. 생태적 파괴 3. 파괴적 기술의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희 세 번째 파괴적 기술에 관련하여서는 생명공학,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에 관련된 기술은 인류의 물리적 생존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의미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의문의 가지고 있으신 혁신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노동력을 덜 필요케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우리 인간은 수천 배로 발전된 환경과는 달리 그 만큼의 행복을 찾는 능력은 퇴화되었기에 불만이 많아지고 삶에의 의미를 잃어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국가나 종교는 사실상 실체가 없는 허구로 인간들을 연결 시킬 수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나 종교,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의 역사를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우리 인류에게 있어서 첫 번째 과제라고 봅니다. 발전한 과학기술은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신적 능력에 버금가는 존재를 탄생시켰습니다.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비유기적인 생명체를 만들 수도 있고,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전능의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신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던 창조와 파괴의 능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인공지능은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기억되고 모집된 데이터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파악하고 반응하는 능력은 날로 커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러가지 정책, 운영, 개발 등의 판단을 인간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질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볼 때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정보, 소득 등 기타 가치를 절대로 소수의 기득권 세력(엘리트)들이 아닌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공동 소유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공동 소유라 함은 모두가 같은 양을 똑같이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순히 기본 소득 분배 같은 것이 아니라 바뀐 세상에 적응하고 또 다른 직업을 영위해나가게 하여 인간의 존재 가치를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각자의 잠재력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활용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현재 디지털 정보의 경우에는 미국과 중국의 두 강대국이 독점을 강화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파멸의 길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은 전체주의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욕심으로 인해 더 많은 인류는 퇴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은 더 가졌다고 착각하겠지만, 그것 또한 더욱 발전할 인공지능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견제할 수 있는 인류의 힘을 키우는 것이 자연과 인류와 인공지능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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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장이라는 말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요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장이라고 하는 것은 나이든 노부모를 산에 버리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나라 사서의 어디에도 이러한 것이 빈번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불경의 '기로국이야기'나 중국의 '효자전' 등에서 설화처럼 전해올 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장이라고 하는 행위는 사실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바로 일본에서 있었습니다. 사실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우바스테야마라고 해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1882년에 발간된 윌리엄 E, 그리피스라는 사람이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hermit nation)'에서 고려장의 내용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과학의 필요성에 따른 일본의 초청으로 1870년 일본으로 가 1871년에 메이신칸에서 이화학을 가르쳤고, 1872년에는 동경제대의 전신인 카이세이에서 화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미국으로 귀국 후 일본을 연구하다가 조선을 알지 못하면 일본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판단해 조선을 연구하게 됩니다. 본 책은 한반도의 고대사부터 을사조약까지 다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일본을 중심으로 놓고 조선에서 미신과 전제왕권을 몰아내고 일본이 서구문명을 도입시켰다며, 아주 조선을 미개하게 보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상기와 같은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부 발생하였던 불미스러운 일을 풍습처럼 묘사했던 것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조선을 가서 확인해보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내용들도 오류투성이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이므로 효를 중요시하는데 이러한 일이 일반적이었다면, 분명 사서에서 다루었을 것인데 그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등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드물게 생활고로 인해 벌어진 범죄행위일 가능성이 큽니다.고려장이라는 내용이 본격적으로 제시된 것은 1919년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에서 미와다 마키가 조선의 전설을 묶어서 발간한 책에서 입니다. 그리고 192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조선동화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구전동화를 내놓았고, 1926년 나카무라 료헤이가 집대성한 조선동화집에도 비슷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일제 강점 시기에 왜 본격적으로 이러한 내용이 나오는지. 어쩌면 효를 중요시하여 부모를 섬긴다는 조선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에도시대부터 우바스테야마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리는 풍습을 덧씌움으로써 아주 미개한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자신들이 조선을 개혁시켜 식민지화 한 것에 대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었는지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외국의 공동묘지 문화나 일본의 자택 사당에 유해를 안치하는 것과 달리 사망 시 양지 바른 산간에 매장하는 풍습을 가진 우리의 풍습을 산 채로 버리는 모습으로 둔갑시켜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화장하여도 집안의 선산 묘터에 매장하는 풍습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더욱 존중하여 좋은 자리에 조상들을 함께 모시고 후대의 가족들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이지 산 사람을 지게에 지고 가서 버리고 파묻는 미친 짓이 아닙니다. 어릴 때는 우리도 학교에서 어떤 의도를 가진 선생님의 말씀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러한 고려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많은 사서와 기록들을 살펴보아도 고려장의 풍습이 횡행하였다는 내용은 없는 듯 합니다. 어느 시대든 그러한 범죄적 사건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풍습이었다면 반드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정말로 구전되던 전설을 일본에서 집대성하여 출간한 것이라면, 그러한 내용은 불효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반증하기 위한 것이지 풍습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과거 텔레비전 방송에 방영하였던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부모님의 병환을 살리기 위해 아이를 뜨거운 물이 끓는 가마솥에 던져 부모를 구했다는 설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끓인 물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산신령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그랬고, 결국 부모님의 병환은 나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부모의 손으로 죽였다는 슬픔에 빠져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살아서 나타났고, 놀라서 가마솥을 열어보니 커다란 산삼 한 뿌리가 있었더라 하는 이야기로 부모에 대한 효를 산신령이 시험하기 위해 그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거에 우리 민족이 아이를 삶아먹는 식인의 풍습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을까요^^. 나쁜 의도를 가지고 곡해하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고려장에 대한 오해가 일본이 의도한 것이면 아주 사악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단순히 전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면, 그냥 거기서 주는 교훈을 내포한 이야기로서 취급하면 될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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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역사 공부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연히 역사공부는 자국의 역사를 먼저 공부해야 합니다.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시기별로 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고대사를 공부하다보면,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주변국들과의 관계나 정세 등이 제시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고로 그 관계국의 관련 역사를 참조하여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대부분은 동양 즉 중국, 일본, 러시아 일부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조선말기)부터 현대사에 들어가면 동양권 뿐만 아니라 서양의 열강들과의 관계도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서양사와 함께 접목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렇게 우리 한국사를 먼저 공부하여 주변의 역사를 관계별로 중간중간 보다 보면 이후 관계국 전체 역사가 궁금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심이 있는 쪽을 선정하여 동양사든 서양사든 전체적으로 살펴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 한국사를 접할 때 교과서적인 부분만을 보는 것은 지양하시고, 다양한 견해의 역사서를 탐독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교과서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합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영토에 대한 문제만 하더라도 중국의 구당서 등에서도 동서 3천1백리, 남북으로 2천리에 달한다고 하고 있으나, 실제로 일부만 반영함으로써 정작 몽골지역에서 고구려토성터 등이 발견되었는데도 그 영토를 한정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최근 많은 사료들이 검증되어 있습니다. 너무 오래전의 사료들이나 우리가 작성한 국뽕의 역사가 아니라 경쟁국이었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므로, 보통 자신들의 더 크게 생각하고 상대를 낮추는 경향이 있는 중국을 감안할 때 기록된 것보다 더 넓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내용입니다. 역사공부에 관심을 가지시는데 대해 기쁨과 독려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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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무슨 뜻 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81년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할 당시에 성철스님이 하신 사람을 통해 글로 적어 전한 말씀이 그 유명한 "뚜렷한 깨달음 널리 비치니 고요함과 없어짐이 둘이 아니라.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것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여기 모인 대중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입니다. 이것은 성철 스님이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때 발간된 에 나오는 중국 승려 청원유신이 남긴 말입니다. 이것은 그냥 해석하면 존재 그대로를 인정하고 순리에 맡기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그리 간단한 내용은 아닌 듯 합니다.불교적으로 해석해보면 보고 듣는 것이 실제이고 그 함의가 관념이라고 둔다면 실제는 색(色)으로, 관념은 공(空)으로 대의하면.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로다'라고 하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절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등 구별도 경계도 없으므로 선과 악, 귀천도 없으며,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설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당시의 시대상이 1980년 군부정권의 계엄령으로 사회가 경직되어있었을 때라 우회적으로라도 정부를 비판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말을 기대하였던 터라 굉장히 독특하고 놀라운 설법이었고 당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실도피처럼 느껴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본다면 현실도피보다는 세상에 대한 자각, 깨달음의 쉬움, 문제의 근원에 대한 인식, 선악의 구분함의 무의미함을 함의로 이야기하며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 행동해야 하며 행동할 때는 사람에 대한 선악의 구분이 아닌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논의해야 하며, 그것은 물과 산처럼 그 존재 그대로를 인정하며 흐르고 변하는 시간처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원리를 이야기한 듯 합니다. 법어이다 보니 해석에는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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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삼국의 말이 서로 같아 대화가 통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백제 신라의 말은 같았다고 보아집니다. 말이 같았다고 보는 것은 여러 역사서에서 기록된 것을 본다면, 서로 회담 자리나 사신 간의 왕래에 있어서 크게 문제가 있지 않았고 통역을 두고 대화하였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현재 지역적으로 보이는 사투리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큰 불편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의 제주도 사투리를 우리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듯이 그 지역에서만 쓰는 말들의 경우에는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되나, 상인 등은 국가에 상관없이 다녔기에 지역, 물건 등을 지칭하는 명칭의 차이가 있을 뿐 어순이나 기본적인 말은 같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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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본 욱일기의 유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일본과 고구려, 백제는 비슷한 문화가 있습니다. 태양을 신성 시 하는 사상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을 승계하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이념에서 태양 속에 산다는 신인 삼족오(다리가 3개인 까마귀)를 신성 시 하였고,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도 동일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제의 문화가 당시 일본인 왜에도 전해졌다고 봅니다. 일본 천황가가 백제의 황가와 관계가 있었고, 그 이전 고조선 시대의 번한, 진한, 마한의 연방국가였을 때에도 왜(일본)은 마한의 영향권에 있었던 곳이었으니까요. 농경사회였던 일본의 경우 하늘을 숭상하였기에 당연히 이러한 문화가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봅니다. 일본 초대 신무 천황이 원정을 나갈 때 그를 인도한 것이 까마귀이고, 천황 즉위식 때 삼족오가 새겨진 곤룡포를 입으며 하늘을 자손(태양의 후예)라는 것을 각인한다고 합니다. 태양을 상징하는 일장기를 처음 사용했던 것은 다이카개신(645년) 이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이 아니라 붉은 색 바탕에 황색 원형으로 되어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사진 출처 : Namu wiki]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의 일장기로 바뀌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로 겐페이 전쟁 말기(헤이안시대) 헤이시 가문과 겐지 가문이 전쟁을 벌일 때 헤이시 가문에서는 붉은 바탕에 황색, 겐지 가문에서는 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의 깃발을 사용하였는데 겐지 가문이 승리하면서 이후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고, 둘째로 그냥 홍백의 조화가 운이 좋다는 설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장기가 에도시대 말기에 선박용 국적표시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 국적을 나타내는 깃발로 일반화되었다고 합니다. 욱일기는 이러한 일장기의 확장판으로 해군과 육군이 1870년 5월 15일 전쟁의 시작과 함께 사용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후 1954년에 다시 일본 자위대의 깃발로 사용되면서 동아시아를 핍박하고 짓밟았던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계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한국, 중국, 동아시아에서는 전범기로서 의미로 굳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독일 나치에 비해 전범 처벌 등이 거의 없었고, 현재에도 독일은 공식적으로 하켄크로이츠를 쓰는 것을 문제 삼고 있지만, 일본은 욱일기 사용에 아무런 제제를 가하고 있지 않아 반성하고 있지 않고 자랑스러워 하며 다시금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비판을 받으며 더욱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의 일본 사람들의 경우 이 욱일기 디자인을 운수대통의 전통적인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하며 그 역사적인 심각성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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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문학에서 인문이라는게 무슨 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문학에서의 인문이라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 인간의 전반적인 근원문제를 뜻합니다. 과거에는 인문학이라 함은 이렇듯 전반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고, 그 범주에 속하는 학문 또한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포함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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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민족 간의 교류가 있다 보면 혼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단일 민족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외부로부터 국가를 구성함에 있어서 다민족-다인종으로 구성되었느냐 아니냐의 판단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 한반도의 경우 북쪽 대륙으로부터 이주해 온 것이 맞습니다. 우리 민족사를 고조선부터로 본다고 한다면 당시 삼한이라 함은 번한, 진한, 마한의 3개의 연방국가였습니다. 번한은 요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어 현 중국의 황하 동남북 지역인 유주 영주 북경까지 세력이 펼쳐있었고, 진한은 시베리아 지역으로부터 아래로 지금 중국의 하얼빈,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관할하였고, 현 한반도의 경우 마한으로 한반도 전체와 일본 서남부까지 관할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국가의 역사서에서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명도전, 비파형동검 등 같은 문화권이라고 볼 수 있는 고대 유물의 분포를 볼 때 그렇게 추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사의 국가의 영토의 경우 지금의 지도처럼 정확한 경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충의 지역을 명기하여 우리의 영향권이다 정도이므로, 그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고조선의 건국 이념은 하늘의 자손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치를 내세웠으나, 실제 종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한 국가 건립의 이념, 문화적으로서 하나의 민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당시 저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말갈, 흉노, 조선, 예 등 여러 민족들이 있었으므로 말과 터전은 달랐으니까요. 이러한 삼한 중 번한이 먼저 망하고, 진한은 부여국으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계속하여 민족이 남하 이주하였습니다. 이주하면서 말갈, 흉노, 예족등은 일부 이주하였겠으나, 원래의 터전에서 바뀐 국가에 예속되며, 생활을 해왔고, 현재 조선의 민족(같은 말을 쓰는 사람으로서)만이 현 한반도에 남았다고 보입니다. 원래부터 한반도에 있던 가야, 신라시대에도 역사 기록 등에 보면 서역(페르시아 등)의 사람들이 들어왔고, 신라의 왕가의 경우 흉노와도 관계있다고도 합니다.따라서 생물학적으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혼혈이 되어 섞였기 때문에 순수한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없지만,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와 비해서는 인종의 형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 동질성이 이른 시기부터 형성되어왔고 지속되고 있으며, 그 편차가 크지 않다는 점으로 봐서 형질적, 문화적 단일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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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한산을 보고 왔는데 궁금증이 생겨 질문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명은 고자루(새끼원숭이라는 뜻) 또는 히요시로 쓰다가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고 합니다. 중간에 기노시타 히데요시라고도 썼다고 합니다.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은 오미국을 평정하면서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으면서 썼다고 하고 이후 태정대신, 관백이 되면서 일왕으로부터 받아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고 합니다.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라고도 썼고, 당시 겐지 씨족이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시계임을 자처했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탓에 조선의 기록 및 일부 문헌에는 다이라노 히데요시라고도 불리었다 합니다. 그런데 다이라노, 후지와라, 도요토미는 천황이나 종실 및 그에 준하는 쪽에서 내려준 성씨인 우지이고 실제 사용한 성씨인 묘지는 하시바였다고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우지는 쓰지 않고 묘지만 남아있기도 하니 하시바가 맞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 듯 합니다. 임진왜란이 1592년부터 1598년의 기간이니 실제성이 하시바 일지라도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왕에게 하사받은 성인 '도요토미'를 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널리 불렸던 것이 사실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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