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광개토대왕은 엄청난 업적을 했다는데 그 업적이 먼가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그해 가을 7월 백제를 공격해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같은 해 10월에는 군사를 7도(道)로 나누어 백제의 중요한 요새인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이후 백제의 반격이 몇 차례 있었으나 모두 격퇴하였다.395년(광개토왕 5)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거란(契丹)의 일파인 패려(稗麗)에 대한 정벌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그간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여 백성들을 노략하며 고통을 주었던 존재였다. 광개토왕은 패려의 3개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였고 포로로 끌려갔던 고구려인들을 구출했으며, 수많은 소․말․양 등을 노획해 돌아왔다.396년(광개토왕 6)에는 다시 백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58성 700촌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고구려군은 백제의 도읍까지 육박하여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이끌어냈고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왕의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까지 받아냈다. 또한 아신왕의 아우를 비롯하여 대신 10명을 인질로 삼고, 남녀 1,000명의 포로와 세포(細布) 1,000필을 획득하여 개선하였다. 398년(광개토왕 8)에는 군대를 파견해 식신(息愼)[숙신(肅愼)] 지역으로 보내 조공을 바치게 하고 고구려의 통제를 강화하였다.400년(광개토왕 10)에는 1년 전에 있었던 신라 나물왕(奈勿王)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해 신라 경내를 침범한 왜(倭)의 군대를 몰아냈으며, 더 나아가 가야(伽倻) 지방에까지 진입하여 대규모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 원정으로 인해 한반도 남부의 세력 구도에 일대 전환이 발생하여 신라는 가야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신라에 정치적․외교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와 가야 지방에서 고구려군에 패퇴하였던 왜는 404년(광개토왕 14) 지금의 황해도 지방인 대방(帶方) 지역으로 침입해 들어오기도 했으나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궤멸시켰다.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407년(광개토왕 17)에도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비문에 결락된 부분이 많아 대상을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많은 학자들이 백제를 대상으로 한 전투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앞서 왜군의 신라 침입이나 대방 침입 역시 백제가 배후에서 관여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가 펼친 군사 활동의 대부분은 결국 백제를 주적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한편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에서 대규모 군사 원정을 펼치던 때 서쪽 국경에서는 후연의 침입이 있었다. 400년(광개토왕 10)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몸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와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함락하고, 고구려 백성 5,000여 호를 끌고 간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후연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섰고, 양국 사이에는 몇 년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 싸움은 407년(광개토왕 17) 후연에 정변이 발생하여 북연(北燕) 정권이 들어서며 비로소 종식되었다. 후연과의 전쟁 과정에서 요동 지역은 온전히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410년(광개토왕 20)에는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였고, 동부여의 지배층, 혹은 집단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압로(鴨盧)들을 데리고 개선하였다. 이것이 기록상에 보이는 광개토왕의 마지막 정복 활동이다. 광개토왕은 2년 뒤인 412년(광개토왕 22)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