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기사환국은 어떠한 사건을 말하는 것 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사환국은 조선 숙종 15년인 1689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원자 정호(호칭을 결정함) 및 인현왕후 폐비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습니다.숙종은 첫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에게서 딸만 얻었고, 다시 들인 왕비 인현왕후 민씨와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후궁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습니다.숙종은 후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에 책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씨는 그 집안이 남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인은 이를 저지하려 했습니다.서인은 숙종의 결정이 너무 이르다며 아직 시간이 있으니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볼 때까지 기다릴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후계를 확정 짓고 왕권의 기반을 튼튼히 하길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장씨의 왕자 이윤이 원자로 정해졌고,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되었습니다.그런데 서인의 대표격 인물인 송시열이 이 문제를 다시 들먹이며 반대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이에 숙종은 크게 화를 내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중진들을 사사하였습니다. 또 남인들을 많이 임명하였고, 지난 경신환국으로 죽은 남인들이 복권되기도 했습니다.더 나아가 숙종은 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인현왕후 민씨를 성종 비 폐비 윤씨의 사례를 들어 폐서인하였습니다. 폐비에 반대한 서인들은 숙종의 명으로 국문을 받고 모두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희빈 장씨는 왕비로 승격되었습니다.따라서 기사환국은 서인이 우세하게 집권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숙종이 계획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남인의 집권은 오로지 국왕의 의도에 따른 결과물이었기에 그 기반이 허약하여 훗날 집권 5년 만에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입니다.
Q. 조선 무오사화는 무엇이고 왜 일어난 사건 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오사화는 조선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발생한 훈구파의 사림파 제거 사건을 말합니다.조선 세조의 즉위를 도왔던 공신과 척신들은 모두 훈구 세력으로서 조선의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성종은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 세력을 대거 뽑았습니다. 사림은 훈구 세력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고, 심지어 세조의 즉위는 왕위 찬탈로서 성리학적 명분론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들로 훈구와 사림은 대립하고 갈등하였습니다.그러던 가운데 연산군 시기에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제작의 기반이 될 사초를 수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관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 세조 시기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헛소문들이 실려있었고, 특히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중국 초나라의 왕 의제의 죽음을 기리는 글로, 의제는 항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는 곧 단종을 몰아내고 죽인 세조를 저격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세조-예종-성종-연산군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었습니다.안 그래도 사림파 대간들의 행동에 불만이었던 연산군은 "김종직의 무리들이 몰래 당을 짓고 세조를 비방한 대역"으로 간주하여 사림 세력을 처벌하였습니다.이 사건은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나타났으나 실상 사건의 처리를 연산군이 주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간의 견제 기능이 약화되었고 국왕의 전제적 성향이 강화되었습니다.
Q. 선군이였던 궁예는 처음과 다르게 폭군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 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궁예는 기록에 따르면 신라 왕족 출신이라고 합니다. 또는 몰락한 진골의 후예라고도 하죠. 그러면서도 불가에 입문하여 승려라는 배경도 가지고 있습니다.따라서 그는 반신라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미륵신앙에 기반하여 하층민들의 지지를 받아 성장하였습니다.그러나 이런 식의 성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고, 궁예는 지금의 평양 주변에 자리잡던 패서 호족들과 제휴합니다. 그들의 군사ᆞ경제적 이점을 이용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그런데 궁예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세운지 얼마되지 않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나라의 이름도 마진, 태봉으로 바꿨지요. 이는 궁예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강화를 꾀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고구려 계승이라는 정체성을 무시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그럼에도 궁예는 자신의 권력에 한계가 있음을 느꼈고, 그리하여 종교의 힘을 빌려 자신을 돋보이려 했습니다. 자신을 미륵부처라 칭하고, 미륵관심법을 거론하며 신하들을 핍박한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궁예는 자신의 부인과 두 아들마저 호족 세력과 연결되었다는 생각에 죽여버립니다. 호족들은 궁예의 폭정에 언제 목숨을 잃을 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마침내 시중 왕건과 4명의 기장들을 중심으로 정변이 발생하여 궁예는 쫓겨났고 고려가 건국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