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과부는 재혼을 못했나?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의 과부들은 조선 전기까지는 재혼이 가능했습니다. 고려 시대까지 부인의 정절은 남편의 생전으로 한정되었고, 이후 과부의 재혼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심지어 고려 성종비 문덕 왕후 유시는 광종의 딸로서 처음에 흥덕원군에게 결혼한후 이혼했다가, 다시 재혼해 왕비가 되었던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것은 조선 전기까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서부터는 성리학 이념과 종법 질서가 강화되면서, 과부대신 아들이 호주가 되는 가부장제가 나타나면서 한 남편만을 섬겨야 한다는 관념이 강화되었고, 과부의 재혼에 대한 규제가 나타났습니다. 또한 재가녀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해서 관료로 나갈수 있는 길을 원천봉쇄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여성들은 남편과 사별한 후에 오랜 세월 홀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Q. 명성황후가 위험을 무릎서고 러시아와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성황후가 위험을 무릅쓰고 러시아와 손 잡았던 이유는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할수 있는 세력으로 러시아를 뽑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1895년 8월 이범진, 박정양, 이완용 등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을 기용해 본격 반일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렇게 명성황후가 일본을 건드리자, 조선의 친러 정책 핵심에 왕비가 있음을 파악한 일본은 왕비를 살해하라는 만행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의 암호명으로는 여우 사냥이었습니다. 잔인하게 살해했을 뿐만아니라, 시신은 불살라져 인근 녹산과 향원정 연못에 버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