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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에녹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에녹 전문가입니다.

박에녹 전문가
경상대학교 교육대학 국어교육전공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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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글 띄어 쓰기는 언제부터 였나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대왕께서 한글 창제시에 발간한 훈민정음해례본에도 그 뒤에 나온 각종 서적의 언해본과 조선 후기에 유행한 한글소설들에도 띄어쓰기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근대전환기와 일제강점기에 주시경과 헐버트 선교사가 함께 한글을 연구하며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띄어쓰기와 마침표 등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한글맞춤법 규정 총칙 2항에서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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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설과 설화는 어떻게 구분을 지울수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먼저 설화가 전설보다 상위개념입니다. 설화는 내용, 등장하는 존재의 성격, 듣는 사람들의 인식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신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나누어집니다. 신화는 신적인 존재가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세상이 창조되거나 국가가 건설되는 등의 거대한 사건들로 마무리가 됩니다. 창세신화, 건국신화 등에서 그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신이며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신성한 장소가 등장합니다. 신화를 사람들은 진실로 믿으며 신성한 이야기로 받아 들입니다. 주로 민족적 범위에서 이야기가 이어져 가게됩니다. 전설은 영웅적인 존재가 등장하고 큰 능력을 발휘하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기장수 전설(설화)처럼 영웅적인 존재가 큰 능력을 드러내지만 비극적 결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로 구체적인 장소나 사물이 증거로 제시되고 지역적 범위에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진실되고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민담은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 흥미를 유발하는 해학적 내용들이 주를 이룹니다. 평범한 인간이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흥미롭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 전설은 설화라는 큰 갈래에 하위 갈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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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국유사는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책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이 서술한 역사서입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기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유사성이 있으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 스스로가 삼국유사를 정사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삼국유사를 야사로 구분짓는 중요한 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서술형식 상으로도 삼국사기는 동양의 정사들의 서술형식인 기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개인의 서술인 삼국유사는 편목 형식으로 으로 내용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설화와 신라향가 등이 수록되어 있는 것도 완벽한 정사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관점에 후대 연구자들이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당대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삼국사기를 역사서로 기록한 것애 반해 삼국유사는 개인의 저작물로 인정되고 있어 정사로 확정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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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의 우왕은 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우왕의 혈통문제는 정사에서 언급되기 보다는 야사 또는 사람들의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소문들이 있었던 이유는 고려 공민왕이 왕비였던 노국공주 사후에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신돈이 고려의 정치를 좌우했던 것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특히 신돈이 공민왕에게 여종 반야를 바치고 그 반야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이 아들이 모니노(왕우) 였습니다. 그런데 공민왕은 황실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고 신돈의 친구인 능우라는 스님에게 아이를 맡겨 키웠고 갑자기 모니노를 후사로 세우고 이름을 '우'라고 칭합니다. 우왕의 어머니가 반야라는 부분에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냐는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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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엔 금주령이 있었다는데 지켜지지 않았던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금주령은 주로 흉년이 들었을때 내려졌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 곡식으로 술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용납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주령은 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깨졌는데 개인적인 일탈로도 볼 수 있지만 주로 금주령 하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술의 가격으로 인해 권력자들과 상인 등이 밀주를 만들어 유통시킨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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