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왕은 부인을 최대몇명 두었나요?
안녕하세요.아래와 같이 정리해 드립니다. 1. 조선시대 왕후는 최고 몇명까지 둘수 있었을까? 왕후(王后)라는 것은 임금의 정비(正妃)가 죽은 후에 추시(追諡)된 존칭입니다.따라서 살아있을 시에는 왕후라는 칭호가 안붙죠. 살아있을시에 중전(중궁전의 준말로 왕의 정실부인)으로 불립니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부일처제를 표방하였죠. 하지만 첩이라는 것을 인정하여 내용으로는 일부다처제입니다. 정실과 첩의 구분을 확실히 하여 제도적으로 첩과 첩의 자손에게 불이익을 줌으로써 표면적인 일부일처제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정실부인이 사망하거나 쫃겨나서 없어 대를 이을수 없는 경우 새로운 정실부인을 둘수 있었죠. 왕실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중전이 폐비되거나 사망했을시에는 세자가 있더라도 왕실에서 새로이 중전을 간택합니다. 중전이 국모의 위치고 궁중 내명부의 최고 자리이므로 오래 비워둘수 없었죠. 양가집 규수가 새로이 중전으로 간택되기도 하지만 후궁들 중에서 중전으로 간택되기도 합니다. 후궁들은 첩입니다. 물론 내명부에 품계(정1품 빈,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등)를 따르지만 엄연히 첩에 속합니다.중전이 살아 생전에 세자를 생산하지 못했고 후궁이 아들을 낳아 세자로 책봉된 경우 그 후궁을 중전으로 간택하기도 합니다.따라서 중전을 몇명까지 둘수 있는가 하고 물으면 답은 오로지 한명입니다.하지만 왕후(정비의 사후 존칭)는 최고 몇명일까에 대한 답은 무한대입니다.중전이 해마다 사망하면 왕의 정비이므로 왕후라는 칭호를 받게되고 중전의 자리를 비워둘수 없어 그때마다 중전을 뽑아야 하죠. 그러므로 계산상으로는 무한대이죠. 하지만 현실에서 중전이 계속 죽는 경우는 없죠. 2. 누가 왕후를 제일 많이 두었을까요? 아래 조선 역대왕들의 왕후를 보면 중종과 숙종이 3명이죠. 성종의 비중 폐비윤씨는 악덕으로 폐비가 되었고 아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로 추존되지만 연산군이 폐위된 뒤에 폐비로 원상복구됩니다. 윗분이 제헌왕후를 왕후라고 말씀하시는데 제헌왕후는 연산군이 왕위에 있을때만 왕후였습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제헌왕후 역시 왕후의 존칭을 박탈당합니다. 따라서 왕후의 호칭을 받은 비가 많으신 왕은 중종과 숙종으로 왕후가 3명입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로마가 동시대 국가들보다 건축과 과학기술이 특별히 뛰어날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로마의 건축술이 발전된 이유는 다양하게 있겠지만 로마 미술의 특성은 건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로마의 건축은 기둥과 들보로 되는 그리스 건축의 구성과, 에트루리아의 성문이나 분묘에 쓰이고 있는 아치형을 채용함으로써 기념비적인 건축을 건조했다. 오더의 양식에서는 그리스의 도리아·이오니아·코린트의 세 양식 외에 이오니아식 주두와 콘크트식 주두를 합친 콤포지트(composite) 양식, 도리아 양식의 변형으로서 주초(柱礎)가 있고 홈을 새기지 않은 토스카나 양식이 생겨났다. 구조면에 있어서는 아치형의 채용에 수반해서, 벽돌이나 돌을 가루로 만든 일종의 시멘트가 건축 공업에 채용되어, 거대한 건축의 건조를 가능하게 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wbc는 언제 시작되고 최고 많이 우승한 국가는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2023년 WBC 일정은 2023년 3월 8일 ~ 21일 (현지기준) 입니다. WBC는 2006년 처음 열렸으며 역대 최대 우승국은 아래 참고 바랍니다. 1회 우승 국 일본 2회 우승국 일본 3회 우승국 도미니카 4회 우승국 미국 WBC 역사 및 창설 배경은 아래 참고 바랍니다. 원래 2001년에 대만에서 프로선수들이 참가하는 확실한 야구월드컵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지만 메이저리그 측의 비협조 및 여러 사정으로 흐지부지되었던 바 있다.메이저리그 사무국이 IBAF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대회를 만든 것은 국제대회의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계 올림픽의 개최 시기인 여름은 각국의 야구 리그가 한창일 때이다. 한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는 프로리그와 상관없이 대표선수들을 차출하거나, 혹은 리그를 중단해 가면서 올림픽에 리그 최고의 선수들을 뽑아 보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오너들의 선수차출로 인한 수입 감소로 인한 반대와 선수 노조의 부상 염려로 인한 반대가 합쳐져서 시즌 중단이나 선수 차출을 거부하였다. 올림픽 때마다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이 시기에 미국 야구계에는 큰 두가지 사건이 벌어지는데 첫 번째로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아메리카 예선이던 2003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미국이 멕시코에게 1:0으로 패배, 광탈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2진급이라지만 올림픽에는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 안에 들어가는 유망주 혹은 대학야구 최고의 선수를 내보내는 미국이 멕시코에게 패배해 올림픽을 못나가는 사태가 벌어지니 당황해 할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두 번째로 2005년 IOC 총회에서 야구가 퇴출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올림픽의 저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개최국들이 얻는 이익에 비해 투자비용이 크다 보니, 올림픽 개최에 소극적으로 나서는 국가들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IOC는 개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종목 숫자를 줄이려 노력했다. 이 종목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야구가 꼽힌 것이다.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빠지게된 가장 큰 문제는 하는 나라들이 적었고, 그 때문에 건설된 야구장이 올림픽이 끝난뒤 폐허가 되거나 철거되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는 점이다. 사실 역대 올림픽 야구가 열린 나라 중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10], 2000년 시드니 올림픽를 제외하면 다른 올림픽 개최국들은 지어진 야구장을 올림픽이 끝나자 곧 철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야구 종목이 열렸던 헬레니코 스포츠 컴플렉스 부속 야구장는 올림픽 종료 후 메이저리그의 지원을 받아 야구리그를 창설해 이곳을 그리스 야구리그의 시발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시장성이 안된다고 판단한 메이저리그가 손을 떼버리면서 2년간 축구장으로 사용 되는 굴욕을 당했다. 이후 2008년부터는 난민 캠프로 활용 중.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야구경기가 열린 우커송 야구장은 애초부터 철거하기 쉽게 조립형 건축물로 건설했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2005년 IOC 총회의 방침에 따라 2012 런던 올림픽부터는 개최 종목에서 자동으로 빠지게 되었었다.그나마 IOC에서 IBAF에 "그럼 농구처럼[15]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출전하면 생각해본다."이라는 제안을 해왔으나 올림픽 출전에 별다른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메이저리그 측에서 거절하면서 IBAF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서 야구가 빠지게 된다.이런 상황속에서, MLB 오너들은 "그럴바엔 차라리 우리가 주도해서 만들면 수익도 나고 시즌 전에 개최하면 몸풀기 게임 정도로 뛸테니 부상 우려도 적어질텐데 괜찮지 않나?"라는 반응을 보이게 되고, 이에 따라 시즌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참가하는 야구의 국제적인 대회 계획을 세웠고 MLB 사무국과 MLB 선수노조가 함께 주관하는 대회에 대한 구상이 나왔다. 명목이 국제 대회이니 만큼 국제야구기구인 IBAF를 끌여들여 IBAF가 야구 월드컵을 폐지하고 대신 이 대회를 메인 대회로 승인을 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 다음으로 야구 시장이 큰 일본의 NPB 사무국과 일본야구기구를 끌여들이며 WBC 운영진의 형태가 갖춰졌다.이는 WBC의 수익금 배분 구조에서 잘 나타난다. 1차 대회의 순수익의 47%는 상금으로, 나머지 53%중 17.5%씩을 공동개최자격인 MLB와 MLBPA(선수노조)가 차지한다. NPB가 7%, KBO가 5%[17], IBAF가 5%를 차지하였다. 그것도 한국과 일본에서 보이콧한다고 으름짱을 놓았는데[18] 야구가 인기많은 나라에서 그나마 경제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큰 두 나라의 이탈은 치명적이라서 급히 양보해 이렇게 올린 것이다. 참고로 수익 조정폭이 미미했던 것은 대회 참가 28개국 선수의 대부분이 MLB/마이너 소속일 수밖에 없는 대회 특성상 MLB 위주의 수익 배분이 불가피했기 때입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우리나라 운동종목중 세계기록을 가지고 있는 종목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아래와 같이 정리해 드립니다. 1.김연아세계신기록 11번기록 그중8번은 본인의 기록 갈아치운것 세계최초로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선수권,그랑프리파이널 모두 우승하여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기록 보유.2. 심권호대한민국 최초 올림픽,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 모두 제패 95년부터 2000년까지 국제대회 204전 204승 전승그랜드슬램 2체급3.장정구대한민국최초 WBC명예의 전당 헌액 83년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달성 이후로 15차 방어전까지 달성 총전적 38승 4패그 외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양궁은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세계기록을 우선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개나리 노란 꼬까신하나 라는 동요작가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확인 결과 최계락님으로 확인됩니다.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아동 문학가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최경호이고, 어머니는 이증수입니다. 참고로 활동 사항은 아래 참고 바랍니다. 최계락(崔啓洛)[1930~1970]은 1930년 9월 3일 경상남도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597번지[현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문학과를 중퇴하였다. 학생 때부터 활발한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으며, 1943년 진주중학교에 입학한 후 『문예 신문』에 동요 「고갯길」을 발표하였고, 『봉화』 지에 동요 「보슬비」, 「해저문 남강」을 발표하는 등 천재성을 보였다. 이중 「보슬비」는 초등학교 교재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진주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47년 『소학생』 지에 발표한 동시 「수양버들」이 추천을 받으면서 등단하였다.1948년 9월 『경남 일보』 기자가 되었고, 1951년 이형기(李炯基)와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을 발간하였다. 1952년에는 월간 아동 잡지 『소년 세계』의 편집 기자가 되었다가, 1953년 대구에서 육군 종군 정찰용 기관지 『전선 문학』 편집을 맡았다. 1956년 부산의 국제신문사에 입사하여 문화조사부장[1961], 편집부 국장 겸 정경부장, 사회부장[1966] 등을 역임하였다. 동시에 동시 시인으로도 열정적인 삶을 살면서, 1958년 이주홍(李周洪)과 함께 부산아동문학회를 결성하고 부산 아동 문학의 초석을 다졌다.최계락의 삶은 문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수하고 투명하고 꾸밈없는 작품처럼 그의 삶도 순수하고 인정 많고 베풀기를 좋아하면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평이었다. 1970년 7월 4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최계락이 활동하였던 부산광역시와 고향 진주시, 그리고 선조의 유택이 있는 경상남도 고성군 등에 시비가 다수 건립되었다. 또 2001년 동생 최종락이 최계락 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인과 동시 시인 중에서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하는데, 2008년부터는 국제신문사와 공동으로 시행하고 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