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추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영화중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는 도가니, 살인의 추억, 이태원 살인사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코리아 , 국가대표, 1987, 화려한 휴가 , 남산의 부장들, 퍼펙트 게임, 집으로 가는길, 홀리데이, 실미도 등이 있겠습니다. 개인적인 사견으로 퍼펙트 게임 최동원, 선동열의 일화를 그린 영화를 가장잼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1886년 고종이 세운 근대식 공립학교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화도조약(1876)의 체결 후, 서양 근대 문명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동시에 국내 선각자들도 해외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정부차원에서도 선진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 해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에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해야 함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이 육영공원(育英公院)이다.일본과 중국을 돌아보고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로 갔다가 돌아온 민영익(閔泳翊)을 비롯하여 개화파인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변수(邊燧) 등이 국가 근대화를 위해서 근대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등 국내의 정치적 소요로 미루어 오다가, 미국에서 헐버트(H. B. Hulbert)·길모어(G. W. Gilmore)·번커(D. A. Bunker) 등 세 명의 교사가 옴으로써 1886년 9월 23일에 개교하였다. 학교 이름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은 ‘(젊은) 영재를 기르는 공립학교’라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서울 정동에 설립하였으나 1891년 전동으로 이전하였다.학생의 구성은, 현직 관료 가운데 젊은 사람을 선발하여 좌원반(左院班)을 만들고, 양반 자제 가운데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우원반(右院班)으로 하여 두 학급 35명을 두었다. 교수들은 모두 미국인들을 초청하였다. 미국인 교수인 헐버트(H. B. Hulbert)·길모어(G. W. Gilmore)·번커(D. A. Bunker)가 1894년까지 근무하였고, 번커가 사임한 뒤에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과 핼리팩스(T. E. Hallifax)가 1894년 폐교될 때까지 대신 근무하였다.학교의 학칙인 계사(啓辭)에 나와 있는 설립목적을 보면, ‘오늘날 여러 나라의 국가간 교제(交際)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학(語學)이다. 이를 위해 공원(公院)을 설립하여 젊고 총민한 사람을 선발하여 학습하게 한다.’ 라고 되어 있다. 당시 외국과의 접촉에 가장 중요한 학문이 외국어라고 생각하고, 여러 교과 가운데 영어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 외에 독서(讀書), 습자(習字), 학해자법(學解字法), 산학(算學), 사소습산법(寫所習算法), 지리(地理), 학문법(學文法) 등의 기초 과정을 수료하고, 다음 과정으로 대산법(大算法), 제반학법-제반역학자(諸般學法-諸般易學者), 만물격치(萬物格致), 각국의 언어·역사·정치 등을 학습하였다.우리 나라 최초의 외국어 학습 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이 1883년에 설립되어 영어 통역관을 양성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육영공원이 설립되어 외국어를 중요시하고 영어 학습을 강력히 실시하자, 같은 관립 학교인 동문학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어 동문학은 3년 만에 폐쇄되었다.육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이긴 하였으나, 지나치게 영어만을 강조하고 외국인 교수만을 채용하는 한편 고급 양반 자제만을 대상으로 하는 등 서민들과는 친숙하지 못하고 국민 대중을 교육하여 계몽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재정난 등이 겹쳐 설립된 지 불과 8년 만에 폐교되었다(1894).
Q.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을사오적은 각각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을 일컫습니다. 조선 말기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무력행사를 통해 청나라 세력을 꺾고(청일전쟁, 1894), 다음의 경쟁 세력인 러시아를 러일전쟁(1904. 2)으로 격파한 다음, 미국, 영국 등 열강들과 침략 상호 묵인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의 실질적 침략인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주조선일본군사령관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어전회의에 참석한 각료들을 강압적으로 압박하여 조약에 찬성할 것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건강상 참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부 대신들이 찬성을 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반대하고 임금께 고하러 가다가 졸도까지 하였다. 당시 총 9명의 대신 가운데, 5명의 대신은 약간의 내용 수정을 한 다음에 최종 찬성하고 서명하였다. 그들은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으로서, 조국을 왜적에게 팔아먹은 매국노(賣國奴)라하여 역사상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이라 칭한다.을사늑약은 외교권 포기, 통감부설치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대외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대내적으로 감독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어 주권국가의 본질을 기본적으로 훼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는 의미를 갖는 조약이었다.그 결과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이 국민을 크게 통분시켰고, 민영환, 조병세 등은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으며 이어서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물리적공격, 전국적인 의병운동 등이 일어났다. 이 조약의 명칭은 한때 일본이 보호조약이란 미명을 사용하였으나, 역사학적으로는 ‘제2차 한·일협약’이라 칭하고, 일반적으로는 보호란 말을 삭제하고 체결된 해를 넣어 '을사조약(乙巳條約)',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强壓性)을 비판하는 뜻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