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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선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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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도세자는 정말 역모를 꿈꿨나?
안녕하세요. 역모를 꿈꿨는지 아닌지 일생을 설명드리자면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무수리의 아들이므로 변변한 외가도 없고 이럴 때 그를 왕으로 밀어준 것이 노론 세력이었지요. 숙종의 아들이라고는 달랑 둘,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과 이 영조 뿐이었니까요. 그러나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은 이미 남인, 소론의 세력을 뒤에 업고 있었으니 노론이 선택할 사람이라고는 영조 뿐이었습니다.이렇게 왕을 선택해 다음 왕으로 미는 작업은 각 당이 살아 남느냐, 죽느냐를 결정 짓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자기 당이 선택한 왕자가 왕위에만 올라준다면, 세력을 확장 시켜나갈 좋은 기회를 얻는 것이니까요.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영조는 왕위에 올랐습니다.물론 노론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지요.자기를 왕위에 올려 준 것도 그렇지만, 영조의 왕자 시절 스승도 대부분 노론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조가 노론과 친밀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영조가 위대한 군왕이었다는 것은 노론만을 편애하지 않으데 있지요.그러나 영조는 노론의 전횡을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해 각당을 고루 기용하는 방법으로 정치를 해나갔습니다.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사도세자가 어느덧 15살 무렵이 되었지요. 이 때 영조는 세자에게 자신의 업무를 대신 보게 합니다. 대리청정이라고 하지요. 물론 중요한 결정은 영조 자신이 했지만 사소한 업무처리를 사도세자에게 맡겼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탕평책을 실시한다고는 했지만 거대한 노론 세력에 왕권마저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사도세자가 알게 된 것이지요.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우직하고 사리분별을 잘하는 똑똑한 왕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당황케하는 노골적인 소론에 대한 편중, 노론에 대한 비판,답답한 영조는 자식을 야단칠 수 밖에 없었겠지요.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노론을 적으로 돌리나.. 그러나 우직한 사도세자는 트릭을 알지 못했습니다. 맞부딪히면 깨진다는 것을 몰랐지요. 이렇게해서 사도세자는 노론을 적으로 돌리고 맙니다.그리고는 계속된 노론의 모함과 영조의 질책,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질책을 아주 두려워했다고 하는군요. 그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이런 증상은 갈수록 심해져서, 화가나면 사람들을 칼로 죽이고, 옷을 입지 못하는 의대증까지 앓게 되고 궁 안으로 여승을 끌여들이기까지 합니다.노론 측에서는 좋은 기회였겠지요. 왕비 정순왕후를 비롯해, 숙의 문씨, 친누이 화완옹주까지... 그들은 끈임없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왕께 고해바쳤습니다.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노론의 영수)마저 그를 포기한 상황이었으니 사도세자는 천애고아와 다름이 없었습니다.그를 지원하는 소론 세력이야 노론에다 비하면 세발의 피였고... 게다가 날이 갈수록 미친 짓은 늘어나고.... 결국 궁궐을 빠져나가 평안도로 몰래 여행을 하는 사태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게 됩니다. 3개월 간의 평안도 여행 이후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히게 되고 이후로 영영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게 되지요.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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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계2차 대전에서 독일,일본,이탈리아가 손을 잡은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탈리아와 독일이 동맹을 맺은 결정적인 계기는 스페인내전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이전 독일과 이탈리아는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는데, 독일의 지원을 받는 오스트리아 나치가 폭동을 일으켜 돌푸스 오스트리아 총리를 살해하고 정권을 찬탈하여 독일과의 합병을 추진하려 하자, 돌푸스 총리와 정상회담차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에서 기다리던 뭇솔리니가 이에 분노해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이탈리아군을 집결시킬 정도였습니다.그러나, 스페인내전은 이런 분위기를 뒤바꾸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스페인의 팔랑헤당(프랑코 등)을 지원했고, 독일도 공군 및 기갑부대를 보내서 스페인을 지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는 서로 가까와지게 되고, 결국 로마-베를린추축의 결정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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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영화 최대 관객은 어떤 영화인가요?
안녕하세요. 우리나라 영화의 관객수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자료가 있네요 매출액, 관객수 스크린수 상영횟수 까지 모두 정리 되어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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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장영실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영실은 조선 세종 때 노비 신분을 벗고 발탁되어 혼천의와 자격루를 발명한 조선의 과학기술자. 본관은 아산. 세종 5년 노비 신분을 벗고 상의원별좌로 임명되어 1424년 중국의 체재를 참고해 물시계를 만들었다. 1433년 호군에 올랐으며, 혼천의를 완성했다. 이듬해 김빈과 함께 자동시보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어 1434년 7월 1일부터 표준시간이 자격루에 맞춰 운용됐다. 이후 앙부일구, 일성정시, 측우기 등을 완성했다. 상호군으로까지 특진했으나 1442년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투옥, 파면 당했습니다. 지금 까지도 쓰이기 보다는 널리 알려지고 활용된 발명품은 아래 정도일 거라고 판단됩니다. ▶측우기측우기는 길이를 재는 자인 주척(周尺)으로 안지름이 7인치(14.7㎝),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 이 원통을 집 밖에 세워두면 빗물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앙부일구해시계로 솥 모양의 그릇 안쪽에 24절기를 나타내는 눈금을 새기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을 꽂아, 이 바늘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눈금에 따라 시각을 알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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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해외에서는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 이유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개인적인 사견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화장실 사용할 때 돈을 받았었죠. 아무래도 화장실 운영에 돈을 충당한다는 의미도 있고 무료로 쓰면 함부로 쓰게 되더라도 소량의 돈이라도 돈을 내게 된다면 인식 자체가 막쓰기 보다는 조심스럽게 쓰게 되므로 그렇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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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에는 손톱발톱을 어떻게 관리했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손톱발톱은 가위나 칼로 깍았습니다.‘신체발부는 수지부모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를 금과옥조로 알고 살던 조선시대에도, 손톱 발톱만은 깎았습니다. 사용하는 도구는 작은 칼이나 가위였는데, 손가락 발가락을 벨 우려가 있어 무척 조심해서 깍았습니다.손톱깎이 전문 도구는 1896년 미국의 채플 카터가 발명했습니다. 이 물건이 미국 특허를 얻은 것은 1905년이었고, 대중화한 것은 1947년 이며 우리나라에는 6·25전쟁 휴전 직후 미군 피엑스를 통해 유입되었다고 하는데, 국산 손톱깎이는 1954년에 출시되었습니다.현재는 세계 제1의 손톱깍기 제조사가 우리나라에 있습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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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실학이 대두하게 된것을 어떤 계기 혹은사건으로 인해서인가요?
안녕하세요. 실학이라고 함은 경직된 학문체계에 대한 반발로 실사구시란 것과 이용후생이라는 것을 표방하는 비판적*실천적 학문사상이라고 할수있죠. 임진왜란에 이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라가 매우 파탄이 나버리고 겉만 중요시 하고 속빈 강정인양 점점 노쇠화되어가는 성리학과 청의 실증적 고증학의 영향으로 형식적 주자학에 회의를 느끼고 결국 몇몇 생각있는 학자들의 새로운 학문정신의 추구했습니다.그리고 그 당시 청을 통하여 서양문물이 조금씩 흘러들어오게 되고 그런 배경에서 의식이 확대되고 영조와 정조시대에 학문장려로 인한 여러 학자들이 생겨남에 따라 이러한 배경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됩니다. 성리학이 첨엔 좋았으나 나중으로 갈수록 점점 실사구시에 조금은 가까운 주기론 보다는 이치에 충실하는 주리론으로 가고 결국 이 껍데기만 남아서 대의명분따위나 예학.보학으로 발전되어 가문유지와 국가체제유지에만 급급해져 버린 상태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며 뭔가 새롭게 떠오른 학문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략 실학이 처음 형성된 배경은 인조반정 이후정도로 볼수있겠고 16세기와 17세기사이에 정여립. 정인홍, 한백겸, 김육, 이수광 정도의 사람이 선구자 역할을 한다고 할수 있겠죠..17세기가 넘으면서 님도 아시는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발전하여 19세기 중반까지 가게 됩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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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과부는 재혼을 못했나?
안녕하세요. 성종 때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처벌이 되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조선은 대체적으로 풍속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주기는 하지만 처벌을 하는 경우는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대신 신체 처벌이나 귀양 같은 형벌은 아니지만 다른 법적인 불이익은 주어서 그게 과거 금지임) 그러니 가혹하고 무서웠던 전근대 시대에도 이런 면은 예외였지요(물론 이도 예외의 예외가 있으나...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들어간 것이고 다른 죄목도 포함이 되는 것임)​그러니 벼슬을 할 아들이 없는 경우 혹은 자식이 아예 없는 경우는 보쌈(과부 업어가기)을 통해서 재혼을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서로 짜고 하지 않는 진자로 강제 납치를 하는 막보쌈도 형사처분을 모른척하면서 약간의 돈을 받고 넘어간 기록은 생각보다는 많이 보일 정도입니다.(사회적으로 허용된 것이 있어서 처벌의 면제가 가능한 것으로 보임) 뭐 민속 기록은 공적인 것이 많은 것이 아닌 건 대도 말이지요​그리고 많이 궁금해 보이는 제가 녀의 자가 과거에 합격을 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저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양반도 보쌈이 없던 것은 아니라서(이런 것은 민속 사니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양반이 수는 적어도 보쌈이 있기는 분명히 어느 정도까지 있었을 것임) 그러니 제가 녀의 자녀인 경우는 그것을 숨기어서 원처나 계모의 자로 속였다고 봐야지요(아니면 가까운 혈족에서 양자를 들인 것으로 속였을 것인데 조선에서 양자는 아주 흔하고 양자는 출세나 과거의 응시에 지장도 없고 양자의 출세는 아주 많은 편임)​천민은 후기로 갈수록 양반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어서 공식적으로 재가를 못했으나 몰래 가는 보쌈을 통해서 과부의 재가는 아주 흔했을 것으로 보이고 남자는 양반도 재가가 아무런 제한이 없으니 이들은 무제한 재가가 가능했으나 양반은 순전히 부모를 잘 만나는 경우가 아니면 보쌈을 당하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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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허준이라는 사람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허준의 업적에 대해 아래와 같이 간략히 알려드립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다 돌아올 때까지 계속 옆에서 병을 치료한 공으로 양평군에 봉해졌으며, 궁중의원인 양혜수, 이명원등과 함께 의학책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1606년 '보국숭록대부'라는 벼슬을 받았다.1608년(광해군 1년), 선조의 병 치료를 소흘히 한 죄로 궁중의원에서 쫓겨났습니다.1610년, 25권으로 된 의학책을 썼습니다.1613년(광해군 5년) 광해군이 잘못을 알고을 간행하도록 하였습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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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구려 미천왕은 소금장수였다가 왕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고구려 15대 미천왕(300〜331)은 매우 특별한 어린 시절을 겪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 소금장수였습니다. 허나 소금장수를 하다가 왕이 된것이 아닌 큰아버지를 피해 궁궐에서 도망치다 불우한 시절을 겪으며 소금장수를 했던 내용이지 처음부터 소금장수는 아니었으니 참고바랍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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