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시청률 조사는 어떻게 하는건가요?
안녕하세요. TNS MEDIA KOREA는 과학적인 조사 연구 및 통계 분석, 그리고 우리나라 방송 광고산업의 환경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 과정을 거쳐 전국 8,000가구에 대해 기초조사를 실시한 후, 이를 토대로 시청률 조사 대상과 전국 1,000가구(4,000명)의 패널 가구를 선정하였습니다.(서울 및 수도권 500가구, 부산 200가구, 대구 100가구, 대전 100가구, 광주 100가구) TNS MEDIA KOREA는 선정된 패널 여러분께 정성껏 마련한 감사의 선물을 드리고 있습니다.또한, 본사 홈페이지의 패널 가구 코너에 접속할 권한을 부여해 드림으로써 패널 여러분이 다양한시청률 데이터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조선시대 호패는 어떻게 만드나요?
안녕하세요. 호패의 관할기관은 서울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 및 수령이 관할하고, 이정(里正) ·통수(統首) ·관령(管領) ·감고(監考) 등이 실제사무를 담당하였으며, 그 지급방법은 각자가 호패에 기재할 사항을 단자(單子)로 만들어 제출하면 2품 이상과 3사(司)의 관원은 관청에서 만들어 지급하고, 기타는 각자가 만들어 관청에서 단자와 대조한 뒤 낙인(烙印)하여 지급하였다. 《속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호패를 차지 않은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위조 ·도적한 자는 사형, 빌려 차는 자는 누적률(漏籍律)을 적용하고 이를 빌려준 자는 장(杖) 100에 3년간 도형(徒刑)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본인이 죽었을 때에는 관가에 호패를 반납하였다.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백년전쟁이 끝난이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장미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랭카스터 왕가와 요크셔 귀족가문이 1455∼1485년에 영국에서 왕위계승권을 놓고 투쟁을 벌인 전쟁이며 입니다. 아래와 같이 간략히 설명해 드립니다.랭커스터왕조는 개조(開祖)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므로 3대째인 헨리 6세 때 요크공(公) 리처드가 랭커스터왕조 이상으로 왕위계승권이 있다면서 궐기하였으며, 여기에 귀족간의 싸움이 결부되어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의 본질은 귀족전쟁이라는 점에 있다. 장미전쟁이라는 이름은 랭커스터왕가가 붉은 장미, 요크가가 흰 장미를 각각 문장(紋章)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나, 내란 당시에는 요크가의 흰 장미만이 존재하였다.1455년 세인트올번스전투로 시작되어 1460년 리처드가 웨이크필드에서 전사하여 장남 에드워드가 그뒤를 이었다. 1461년 에드워드는 랭커스터파(派)를 타우턴전투에서 격파하고 헨리 6세를 국외로 추방했다. 에드워드는 이 싸움 직전에 즉위하여 에드워드 4세라 칭하고, 랭커스터파 사람들을 반역죄로 몰아 영지를 몰수하고 헨리를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그후 에드워드 4세 옹립에 큰 공이 있었던 요크파의 워릭백작이 반란을 일으켜 1470년 에드워드 4세를 국외로 추방하고 헨리 6세를 구출했다. 에드워드 4세는 세력을 회복, 귀국하여 1471년 바넛전투에서 워릭 백작을 패사(敗死)시켰다. 그 결과 헨리 6세는 다시 붙잡혀서 살해되고 랭커스터왕조는 멸망하였다.에드워드 4세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의회를 열지 않고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인 정책을 채용하여 절대왕정의 경향을 나타냈으나 1483년 사망하였다. 12세 된 장남이 에드워드 5세로서 즉위하였으나 왕통이 확립되지 못하고, 전왕의 아우 글로스터공 리처드가 에드워드 5세를 투옥하고 리처드 3세라 칭한 후 동왕을 살해하였다. 이 무렵 대륙에 망명해 있던 랭커스터계의 리치먼드백작 헨리튜더는 1485년 웨일스에 상륙하여 보즈워스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패사시켜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은 끝났다. 헨리는 즉위하여 헨리 7세라 칭하고 튜더왕조를 열었다.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충정작전'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의 특별지시가 1·2·3야전군사령관과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치안본부장에게 내려졌다. 그 내용은 1/4분기의 충정훈련을 2월 중 조기 실시해서 완료하라는 것이었다.같은 해 3월 4일에서 6일까지 수경사(現 수방사)에서는‘제1차 충정회의’가 열렸다.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1·3·5·7·9·11공수특전여단장, 20·26·30보병사단장 및 해당부대 작전참모, 치안본부장, 시경국장 등이 참가한 이날 회의는 수도권 소요사태에 대한 대비태세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회의에서 수도권 소요사태에 대한 대비책과, 향후 충정훈련을 더 강화하고 즉각적인 출동태세를 유지할 것을 결정했다.4월 12일 특전사령관 정호용은 수도권 지역의 충정작전 출동을 위한 차량 배치를 육군참모총장에게 요청했다. 육군본부는 제1항공여단에 중앙기동부대인 5개의 항공조를 편성 대기하도록 지시했으며, 특전사에는 공중지원에 소요되는 화학탄과 화염방사기 및 병력을 1항공여단에 지원하며 각급 부대는 500MD 운용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훈련을 실시토록 지시했다.당시 공수부대원들은 광주로 투입되기 전에 시위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의 강도는 대단히 높았다. 많은 공수부대원들은 1980년 초반부터 이전보다 충정훈련 시간이 많아졌으며, 부대에서 퇴근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충정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