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북한의 독립운동가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두봉(金枓奉, 1889년 2월 16일 출생 ~ 1960년 4월 4일?[1] 사망 추정)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한글학자(일제 시대 독립운동가, 교육자, 작가, 언론인, 정치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경상도 기장현(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출생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백연(白淵)·백련(帛連)이며, 별명은 태항산의 호랑이였다.[2]구한말기에는 한글학자 주시경의 수제자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잠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의 한글 사전인 《조선말본》과 《깁더 조선말본》의 저자였으며, 《말모이》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이다.중국에서 학자 활동과 무장투쟁 활동을 하다가 1935년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940년 이후 화북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광복 뒤에는 38선 이북으로 귀환,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북한의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6년 10월부터 1948년 9월까지 김일성종합대학의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라는 곳은 조선의 심장부이니 우리 몸에 심장보다 중요한 곳은 없으니 심장을 장악하고 8월까지는 기어코 통일 정부를 구성하자며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키는 데 동조했다. 그러나 1958년에는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며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시점은 미상이다. 위상 부분까지는 명확한 파익이 힘드네요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Q. 청나라 만주족은 왜 변발을 했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청나라 만주족들의 머리 형태는 변발(辯髮)이라고 하여 머리의 앞부분은 말끔하게 밀어 버리고, 머리 뒤에 남은 머리카락은 한 가닥으로 땋아서 내리는 형태였습니다. 만주족들은, 머리 뒤에 있는 변발을 사후(死后)의 영혼이 들어가는 곳으로 생각하였고, 늘 전쟁을 겪으면서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모두 가지고 돌아올 수는 없었으므로, 죽은 자들의 머리를 잘라 가지고 돌아 온 후 이것을 안장하며 정중하게 장례지내는 관습이 있었죠.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전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는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아래와 같이 정리해 드립니다. 1. 땅크기 +(인구수) BEST 5 러시아 : 17,075,200㎢ (인구111,016,896명) 중국 : 9,596,960㎢ (13억 7354만 1278명) 인도 : 3,287,590㎢ (1,380,004,385 명) 2. 대한민국 면적 순위는 국가통계 포털기준 108위 입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Q. 김,이,박 등 성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건가요?
안녕하세요.요즘에는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래부터 누구에게나 성씨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성씨가 없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성씨가 생겼을까요?우리나라에서 성씨가 생긴 때는 삼국 초기로 추측되고 있습니다.그러니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건국 신화를 보면 이 때부터 성씨가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성씨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요컨대 일부 왕족과 귀족들이나 성씨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평민들이 성씨를 갖게 된 것은 고려 기대의 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였습니다.하지만 이것도 소수의 평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신분이 낮은 천민이나 노비들은 성씨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까지도 천민과 노비들은 성씨가 없이 그냥 이름만 사용했었습니다.그러다 19세기가 되면서 우리나라에 개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천민들도 점차 성씨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우리나라는 매우 어지러워 돈만 있으면 양반도 살 수 있는 시대라서, 양반과 함께 성씨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 결과 20세기에 와서 모든 사람들이 성씨를 갖게 된 것이랍니다. 현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씨는 김, 이, 박, 최, 정 등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3백여 개의 성씨가 있습니다.
Q. 프랑스가 예술분야가 뛰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보통 예술이라고 하면 나라가 안정되고 부유할때 많이 발달하게 되어있습니다.약400여년전에 프랑스에서는 왕권으로 나라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대표적인 예로 루이14세가 있는데 '짐은 곧 국가다' 라고 할정도로 왕권이 강했죠.그에 따라 귀족들도 매우 세력이 강하였고, 그들은 그들을 일반 시민들과 다르게 하기위해서예술에 신경을 썻을뿐만아니라 예의 범절에서도 매우 엄격한 규칙을 두었습니다.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식사, 대화, 인사에서 많은 예절과 규칙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이것이 이때에 비롯된것입니다.그때 귀족들이 평민들과 가장 차이를 둘 수 있었던 것은 예술 분야 였습니다.평민들이 즐기지 못하는 예술분야를 사랑하고 좋아함으로서 그들보다 문화적으로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그들 스스로도 예술을 좋아한 면도 있었으므로,그들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예술이 가장 잘 말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귀족들은 예술이라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덕에 프랑스에서는 그때 당시의 미술이가장 발달하여 있습니다.게다가 위치상 로마제국이 멸망할 당시에 그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민족이기도 하고요.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시대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게다가 상당히 오랫동안 강대국이어서 풍족한 생활을 오래할수 있었기 떄문이기도 합니다.밥먹기도 힘든 약소국이 었다면 예술은 사치에 불과하죠.이런 여러가지 여건이 합쳐져서 지금의 프랑스 예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프랑스 인들의 낭만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프랑스 인들의 낭만은 우선 그들의 풍족함 떄문입니다.그들은 넓은 대지와 평야를 가지고 있어서 고대부터 먹을것 입을것을아주 풍족하게 소유할 수가 있었습니다.게다가 왕족의 번성때문에 매우 많은 음식이 말달하게되었습니다.(소문으로는 거의 중국음식정도로 종류가 다향하다고 합니다.)그래서 항상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기때문에 여유를 가질수 있어서 낭만이라는것을즐길수 있지않았을까하는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프랑스 옆에 있는 독일은 예전까지는(적어도 200년 전까진) 아주 약소한 국가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그래서 먹을것이 풍족하지 않았기때문에 프랑스에 비하여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래서 독일인들을 프랑스인들에 비해서 덜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시게 될것입니다.음식에서만 보아도 프랑스인들은 아주 배불리 2~3시간 식사를 하는 반면에독일인들은 적당히(과장해서 말한다면 배고프지만 않을정도로) 약1~2시간안에 식사를 끝낸다고 합니다.이런게 지리적, 생리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두나라의 차이의 일부죠.간단히 말한다면 프랑스의 예술과 낭만은 그들의 오랜 풍족한 생활덕분이라고 할수가 있겠죠.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