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26인의 원수 중 한명인 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프랑스 제 1제국의 군인이자 원수였던 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는 1804년에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임할 때 원수로 임명되었다는데요.
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세는 1754년 7월 31일 브장송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 몽세에서 변호사 프랑수아 앙투안 자노와 마리 엘리자베트 기욤의 차남으로 출생, 그의 아버지는 아들들도 법조인이 되기를 희망하여 9살 된 몽세를 브장송의 콜레주에 입학시키나 군인이 되고 싶었던 몽세는 1768년 학교를 탈출해 아버지 몰래 콩티 보병연대에 자원입대했고 6개월만에 아버지에게 적발되어 학교로 돌려보내지나 그는 몇 달 후 다시 탈출을 감행하여 샹파뉴 연대의 척탄병이 되었습니다.
1774년 프랑스 왕립헌병대 산하의 뤼네빌 영국헌병부대에 들어가 헌병이 되었고 1779년 에는 나소 보병연대 소위로 재입대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일어났을 때 몽세의 부대는 서피레네군에 소속되어 에스파냐 전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1793년 6월 6일 샤토피뇽 전투에서 공을 세워 소령으로 진급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빠르게 승진해 이듬해 6월 21일 소장이 되며, 8월 21일 자크 레오나르 뮐레장군의 뒤를 이어 서피레네군 사령관으로 임명, 오르바이세타 전투에서 에스파냐군을 격퇴하고 빌바오 시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에스파냐와의 전쟁이 마무리 된 후인 1797년 10월 26일 몽세는 장 샤를 피슈그뤼장군과의 친분이 문제가 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무능한 총재정부와 500인회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지지했으며 나폴레옹은 그를 제 19군관구 사령관으로 기용합니다.
1800년 5월 몽세는 구 헬베티아군으로 구성된 라인군의 우익을 지휘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알프스를 넘었고 나폴레옹이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동안 그는 밀라노를 방어하고 롬바르디아주 일대의 치안을 유지했습니다.
1801년 12월 3일 몽세는 프랑스 국가헌병대의 수석총감으로 임명, 그는 1814년까지 헌병총감으로써 국가헌병대의 개혁과 재편을 담당, 1807년 12월 그는 대서양연안국경경비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에스파냐로 이동, 그러나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시민봉기가 발생하고 프랑스군이 이를 강경 진압하자 에스파냐 전역에서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그는 에스파냐 방면군 제 3군단을 지휘하여 발렌시아까지 진격하나 발렌시아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합니다.
11월 5일 나폴레옹이 에스파냐에 도착하자 전황이 바뀌기 시작, 몽세는 장 란 원수, 미셸 네 원수와 협력해 투델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사라고사로 진격, 그러나 1809년 1월 2일까지 사라고사가 함락되지 않자 나폴레옹은 사라고사 포위전의 지휘관을 장 앙도슈 쥐노 장군으로 교체, 몽세를 프랑스로 소환합니다.
1814년 1월 8일 몽세는 파리 국민위병의 지휘관이 되어 3월 30일 파리 전투에 참전, 그는 클리시의 바리케이드 뒤에서 분전하나 파리는 제 6차 대프랑스 동맹군의 손에 함락되었고 4월 1일 그는 국민위병의 지휘권을 반납하고 나폴레옹이 있는 퐁텐블로로 향했고 나폴레옹이 퇴위를 결정하자 그는 파리로 돌아왔으며 루이 18세의 뜻에 의해 헌병총감 직책을 유지합니다.
백일천하 때 몽세는 나폴레옹을 외면할수 없지만 자신을 우대해 준 루이 18세를 배신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 그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자택에 칩거, 전후 미셸 네 원수의 재판에도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나 이로 인해 국왕의 노여움을 사서 모든 직위와 칭호를 박탈당하고 2개월동안 감금되었습니다.
1816년 2월 루이 18세는 몸세를 사면하고 그의 공작위와 원수 칭호를 되돌려주었습니다.
1840년 12우러 15일 몽세는 앵발리드에서 거행된 나폴레옹의 국장 행사에 참여, 그로부터 약 1년 반 뒤 1842년 4월 20일 그는 파리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 그의 유해는 앵발리드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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