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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공민왕과 승려 신돈은 어떤관계 였나요?

아주 오래전 배우 손창민씨가 나왔던 드라마 '신돈' 을 재밌게 시청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신돈이 권력이 점점 강해졌던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공민왕과 승려 신돈은 대체 어떤관계 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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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돈은 고려 말기에 옥천사라는 절에서 노비로 일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천한 신분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하며, 승려가 된 이후 공민왕의 눈에 띄어 정치의 길로 나섰다. 공민왕은 한 승려가 자신을 죽이려는 강도로부터 구해주는 꿈을 꾸었는데, 김원명이 데려온 신돈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신돈이 꿈에서 본 승려의 얼굴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개혁을 위해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던 공민왕은 신돈을 자신의 사부로 임명하고 개혁 정치를 맡겼다. 신돈은 우선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관청을 세웠다. 전민변정도감이란 친원파를 비롯한 권문세족들에게 빼앗긴 토지를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들에게 양인의 신분을 되찾아 주기 위한 기관이었다. 이에 백성들은 신돈의 정책을 지지했지만 권문세족들에게는 미움을 샀다. 이에 더해 신돈은 과거 시험을 실시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면서 권문세족들을 위협했다.

      결국 권문세족들은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했다. 그들은 신돈이 겉으로는 성인인 척 하면서 뒤로는 부패한 행동을 일삼는 ‘요승’이라고 비난했고, 신돈은 1371년에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하고 말았다.

      신돈의 죽음에는 공민왕의 뜻도 있었다. 공민왕은 처음에는 신돈을 깊이 신뢰했지만, 신돈의 과격한 개혁으로 인해 원성이 높아진 데다 지나치게 그의 권력이 커지자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공민왕은 신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돈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돈 - 공민왕을 도와 개혁 정치를 펼친 고려의 승려이자 정치가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승려 신돈의 등용은 공민왕대 정치에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본 논문은 그러한 이례적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규명하기 작성되었다. 신돈의 등용은 공민왕의 의지였다. 두 가지 상황 하에서 공민왕은 이같은 파격적 정치를 단행했다. 첫째, 공민왕은 연저호종공신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 왔었다. 그러나 정세운 살해사건을 계기로 공민왕의 측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결국 흥왕사의 변란에서 확인되듯이, 일부 세력은 공민왕 시해를 시도했다. 이 사건의 결과 공민왕의 충성스러운 측근들이 살해당했고 공민왕은 연저호종공신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다. 이제 공민왕은 새로운 측근을 필요로 했다.

      둘째, 기철이 제거된 이후, 원조정의 실력자 기황후는 공민왕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홍건적의 반란에 직면한 원조정은 공민왕을 징치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홍건적이 진압되자 원은 즉각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였다. 덕흥군 책봉을 관철하기 위해 원은 군대를 고려로 파견했고 공민왕은 무장세력을 동원해 그들을 막아야 했다. 덕흥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후, 고려 조정에서 무장세력의 지위는 상승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 13년 기황후가 원조정에서 실각하고 원이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면서 공민왕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신돈은 이런 분위기에서 공민왕에 의해 등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한 신돈은 공민왕의 기대에 부응해, 유숙과 김보와 같은 연저수종공신, 최영으로 대표되는 일부 무장세력, 이공수와 이수산과 같은 기씨일문과 가까웠던 인물들을 권력의 주변부로 몰아내었다.

      -출처:한국학술지인용색인


    • 고려시대의 공민왕과 승려 신돈은 서로 다른 역할과 위치에 있었지만, 특정한 관계를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공민왕은 고려시대의 31대 왕으로,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신뢰심이 깊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고려시대의 중앙 집권적인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정치적인 안정과 사회적인 변화를 추진했습니다. 공민왕은 대외정책에서는 금상첨화, 경제발전, 문화예술의 육성 등을 추구하였으며, 신라와 고려 사이의 정치적인 연합을 강화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신돈은 승려로, 불교의 수행과 교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승려 중 한 명으로, 도덕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신돈은 불교의 가르침과 실천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평화와 선(善)을 향한 인간의 발전을 주장하였으며, 도덕적 가르침과 품성의 향상을 중요시했습니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며, 특정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역할을 통해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쳤고, 고려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