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68년(공민왕 17년) 12월 공민왕은 이춘부를 우시중 이인임을 좌시중으로 하여 2인 수상체제를 갖췄습니다. 조정의 두 수상이 모두 신돈정권과 밀접한 인물들로 채워지자 바야흐로 신돈 정권은 절정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1369년(공민왕 18년)에 들어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사심관 제도의 복설을 둘러싼 국왕과 신돈의 갈등입니다. 그해 2월 신돈은 스스로 5도도사심관이 되고자 삼사를 통해 사심관 제도를 회복할 것을 국왕에 요청했습니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에서 지방을 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지방출신 중앙관원을 통해 지방의 수취체계를 관리토록 하였습니다. 사심관들은 지방 향리층을 감독 통제하여 백성들의 부역을 공정하게 하고 풍속을 교정하는 등 지방의 민심을 안정시키며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지배권을 굳히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심관들이 토지와 백성을 점탈하는 등 폐단이 발생하자 1283년 1차적으로 폐지되었다가 1318년 완전히 혁파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돈이 사심관 제도를 부활시키려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잦은 암살 시도를 겪으며 중앙 정계 장악에 한계를 느껴 지방과 연계하여 약화된 정치적 입지를 회복 강화하려한 것입니다. 공민왕은 삼사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합니다. 신돈은 뜻대로 되지 않자 마지막 카드로 천도를 주장합니다. 이춘부를 통해 천도 하고자 한 곳은 고려 왕조가 대대로 중시한 서경도 공민왕 재위 초반 시도한 한양도 고려의 한때 수도였던 강도도 아닌 충주였습니다. 결국 공민왕은 사심관 제도와 천도를 다 부정하고 신돈을 쳐버렸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상도 영산현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생불(生佛)이라는 소문을 들은 공민왕이 영산현까지 직접 내려가 신돈과 개경 현화사로로 모시고 왔습니다. 신돈은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왕사로 궁궐을 출입하였으며, 공민왕은 개혁정책을 추진하려고 신돈을 기용했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이 여타 신하와 달리 파당에 속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리사욕이 없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여 신돈을 전면에 내세우고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합니다.
그러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공민왕은 절망감에 모든 권한을 신돈에게 맡기면서 그의 권력은 더욱 높아집니다. 신돈은 환속을 하고 성균관 개편과 이색 등 인재 등용,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적극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반발과 신돈의 축첩 등 기행으로 반발이 거세지다가 공민왕이 개혁에 대한 염증으로 제거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산현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생불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영산현까지 직접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했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한 공민왕은 신돈의 달변에 매료됩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긴 했으나 언제든 제거할 생각이 있었고 신돈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세력이 형성, 공민왕은 신흥무인세력과 권세가들을 견제하려 신돈을 내세우게 됩니다.
신돈은 공민왕의 힘으로 기존의 권력구조를 바꿨고, 신진사대부들이 진출할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렇게 쓸모를 다한 신돈은 권력에 집착하게 되면서 공민왕의 경계를 받고 끝내 역모혐의로 처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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