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0년 2월 14일에 마나베 쥬조 재판장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법정을 자신의 의견을 펼칠 장으로 보고 있던 안중근은 항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를 존경하던 미즈노는 이를 제지하면서 "항소하면 조선의 지사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느냐"고 했고, 안 의사는 여기에 동의해 항소를 포기했다고 하며, 수감 뒤 서예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몰두했다고합니다. 이후 3월 26일 오전 9시에 정근, 공근과 마지막 면회를 가졌다가 10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했습니다. 본인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형을 일제에 요구했으나 일제에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교수형을 집행하였으며 이 때 나이 32세였습니다. 조선인들에게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고 그가 순국 후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 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끝끝내 넘겨주지 않았습니다.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