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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23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 계획을 세운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대한민국의 물류의 중심지 경부고속도로 1968년 당시의 일을 계획 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박정희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계획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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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교통 인프라는 철도 중심이었습니다.

    한미합동조사단에서 내놓은 자료에서도 고속도로 건설은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통수단으로서 자동차 성능 향상과 보급이 눈부시게 이루어지던 당시

    자동차 도로 확충에 대한 요구가 나오게 되면서 60년대 중반 도로의 향후 수요 증가량,

    도로가 여객, 물류 부분에서 철도를 압도한다는 전망들이 나오면서

    ‘국토계획기본구상’이 수정, 보완되어 명문화되면서

    경부고속도로는 고속 국도 1호선으로 시공하게 됩니다.

    국토 이용계획과 구상이 실현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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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대국토 건설계획’을 밝힘으로써 일반 국민에게 알려졌는데 박정희는 대국토 건설계획을 발전시켜 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1967~1971) 내에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를 완공한다는 시행계획을 입안 했고 박정희는 군 건설공병단까지 투입하는 등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군사작전처럼 진행해 나갔다고 합니다. 총 길이 428km, 총공사비 429억 원, 동원 인력 900만 명, 중장비 165만 대, 철근 5만 톤, 공사 중 사망자 77명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공사는 일정보다 1년을 단축한 29개월 만에 끝나고 전 구간이 개통되는 ‘신화’를 완성했습니다.

    경부선의 목적은 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하는 산업고속도로이자 국토의 남북을 관통함으로써 지역 간 교류를 가장 확대 시킬 수 있는 국가 기간 도로망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농어촌 개발과 지역 격차를 해소하고 국민에게 편익을 주는 생활·경제 고속도로의 목적으로 건설되었다고 당시 정부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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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3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할 당시의 기점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이고 종점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이었으나, 2002년 5월 1일에 변경된 노선체계에 따라 기점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구서 인터체인지)이고 종점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수도권과 영남지방을 이으며, 인천과 부산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산업대동맥 구실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울·수원·오산·천안·대전·영동·황간·김천·구미·왜관·대구·영천·경주·언양·양산·부산 등 주요 지역을 경유하여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도로는 왕복 4∼8차로로 이루어져 있으며, 왕복4차로는 267.6㎞, 왕복6차로는 57.2㎞, 왕복8차로는 100.6㎞입니다. 행정구역별 도로 연장길이는 서울특별시 11.5㎞, 부산광역시 7.4㎞, 대구광역시 26.9㎞, 대전광역시 19.1㎞, 울산광역시 27.6㎞, 경기도 55.8㎞, 충청북도 88.9㎞, 충청남도 36.4㎞, 경상북도 128.5㎞, 경상남도 23.4㎞입니다. 서울특별시의 양재 나들목에서 한남 나들목 구간은 2002년 12월에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어 현재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되었습니다. 이 구간 중 일부 구간의 최고속도는 시속 80㎞입니다. 건설당시의 설계기준은 노폭 22.4m, 최소 곡선반경 300∼600m로 하여 시속 80∼120㎞로 주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나 현행 주행속도는 최고시속 100㎞, 최저시속 50㎞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전 구간이 4차로로 건설되었으나 교통수요의 증대에 따라 1992년 7월에 양재∼수원 간의 18.5㎞는 8차로로 확장되었고, 1993년 7월에는 수원∼청원간의 100.1㎞가 6∼8차로로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구미∼동대구간의 60.8km는 2003년 12월 25일에 기존의 4차로에서 8차로로 확장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구배가 심하여 교통사고가 잦았던 추풍령 구간의 구미·김천·영동 나들목 구간은 2006년 12월 13일에 기존의 4차로에서 6차로로 확장되었습니다. 중부고속도로와 노선이 겹치는 충청북도의 남이 분기점·청원 분기점 구간과 경기도 오산∼동탄 분기점 구간은 왕복 10차로로 확장되었습니다. 한편 1994년 9월 17일부터 서초 나들목에서 신탄진 나들목에 이르는 구간에 주말 버스전용차로제가 도입되었으며, 2008년 7월 1일부터는 한남대교 남단에서부터 오산 나들목까지 평일에도 버스전용차로제가 시행중에 있습니다.


    건설계획 당시의 일반적 원칙은 서울∼부산간의 주요도시를 경유하도록 하여, 공사비·통행료·유지비를 절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존 도로 및 철도·항만·공항 등 종합교통망 구성을 감안하여 농공병진(農工倂進)과 균형적 국토개발을 위한 척추 종관기간선(脊椎縱貫基幹線)을 구성하도록 하였습니다.


    최종적인 노선결정은 서울∼대전 구간은 1968년 1월에 확정되었고, 대구∼부산 구간은 경주와 언양을 경유하는 방안과 밀양과 마산 또는 창녕과 마산을 경유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엇갈리다가 1968년 4월 25일에 현 노선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노선확정에 가장 고심한 구간은 대전∼대구 구간으로, 이 구간은 교통량이 적고 지형이 험하여 2차선으로 연결시키기로 구상하였다가, 그해 10월 17일에 당재·묘금리·황간·추풍령을 잇는 4차선으로 확정하였습니다. 총건설비는 384억 5600만원과 용지비 20억 100만원, 부대비 25억 1600만원을 포함하여 429억 7,300만원이 소요되어 ㎞당 건설비는 1억원을 상회하였습니다.


    공사규모는 토공량 약 6,100만㎡, 교량 346개소(총연장 19.46㎞), 터널 6개소(총연장 4.15㎞) 등이고 도로건설에 동원된 연인원은 약 900만명에 달하였습니다. 서울∼부산간 전노선의 교차시설은 모두 입체교차로로 되어 있는데, 건설당시에는 19개의 교차로가 설치되었으나, 개통 이후에 28개소로 확충되었습니다. 2008년 기준으로 교량은 853개소이며, 터널은 22개소가 있습니다. 가장 긴 교량은 2006년에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건설된 추풍령대교(양방향)로 길이는 974m에 달하며, 가장 긴 터널은 2003년에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에 건설된 옥천3터널(부산방향)로 총 연장은 1.6k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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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 계획을 세운 이유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주요한 이유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경제 발전: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전략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국내 물류 및 교통 인프라가 강화되고 산업 활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2. 국토 통일: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로서, 국토 통일의 심볼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를 통해 분단된 한반도의 교류와 통일을 촉진하고 통일을 위한 물리적 연결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3. 국민 통합: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전국적인 국민 통합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주요 도시와 지방을 연결하는 이 도로는 지역간의 교류와 상호 연결을 강화하여 국민들의 이동과 국내 통합을 촉진하였습니다.

    4. 국가 이미지 강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를 통해 국가의 발전과 선진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사업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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