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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23

고려시대 혜종은 어떤 왕이었나요??

안녕하세요. 후삼국시대를 태조왕건이 통일하고나서 그 이후에 있던 왕인 혜종은 어떤 왕이었나요? 혜종의 업적은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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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3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재위 943∼945. 이름은 왕무(王武). 자는 승건(承乾).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921년에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943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 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한편, 이복동생인 왕요(王堯: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 지금의 平壤)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해 은근히 왕위를 엿보았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백여 명을 죽였다. 이 무렵 박술희도 갑곶(甲串: 江華)에 유배된 뒤 살해되었는데, 왕요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혜종이 죽자 왕요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혜종의 죽은 원인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 견해가 있다. 능은 순릉(順陵)이며,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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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혜종은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921년에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943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습니다. 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이복동생인 왕요(王堯: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 지금의 平壤)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해 은근히 왕위를 엿보았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백여 명을 죽였습니다. 이 무렵 박술희도 갑곶(甲串: 江華)에 유배된 뒤 살해되었는데, 왕요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혜종이 죽자 왕요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혜종의 죽은 원인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능은 순릉(順陵)이며, 시호는 의공(義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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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제2대 대왕. 묘호는 혜종(惠宗), 시호는 의공대왕(義恭大王). 휘는 무(武), 자는 승건(承乾). 후백제에서 태봉으로 전향한 나주인 장화왕후 오씨 소생으로, 태조의 장남이자 공인된 후계자였다.


    '무'(武)라는 휘처럼 대단한 전투력을 가진 군인이자 장군이었다. 자신을 시해하려고 침소에 날카로운 검을 들고 난입한 자객들을 검을 쓰지 않고 맨주먹만으로 때려잡은 일화가 있을 정도. 실제로 10대, 20대 시절엔 왕건을 따라 여러 전쟁터를 누비며 후삼국 통일에 많은 무공을 세우기도 했다.[4] 그는 왕건의 고려 창업과 통일 대업에 전공을 세웠던 굳센 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짧았던 재위 기간과 미약한 권력으로 인해 현대에 와서 나약한 임금이었다는 오해를 자주 받곤 한다.


    다만 태조 왕건의 적통을 이어받아 제위에 오른 혜종의 위상은 남다른 바가 있었으니 먼 후손인 예종과 공민왕이 제작한 <태묘악장>(太廟樂章)에서 혜종은 어느 제왕들보다 칭송을 받기도 했다. 세간의 평가와는 별개로 그의 성품은 전쟁영웅답게 호방하고 관대했으며 지적 능력도 갖췄다고 하지만 본인을 시해하려는 암살 시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자 이후 성격이 극도로 날카롭고 예민해지면서 조울증이 의심되는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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