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핫뉴스실시간 인기검색어
아핫뉴스 화산 이미지
아하

학문

역사

깔끔한다람쥐146
깔끔한다람쥐146

이봉창 의사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오늘(1월 8일) 이봉창 의사 의거 91주년 기념식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고 신문을 통해 간략히 기사 제목만 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독립운동가 이신 이봉창 의사의 주요 업적과 활동에 대해 문의 드립니다.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흡족한바구미271
      흡족한바구미271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0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용산 문창(文昌)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있다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기차운전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형 범태(範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도쿄[東京]·오사카 등지를 전전하였다.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梁履涉)과 이춘태(李春泰)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溥儀]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白貞善)으로 둘러댔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고지마치구(麴町區) 밖 사쿠라다몬(桜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여 기다리던 이봉창 의사는 오후 2시에 관병식을 마친 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의 행렬이 나타나자, 군중 속에서 뛰어나와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일왕이 탄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한 데다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수와 근위병에게만 부상입혔을 뿐 왜왕을 폭살시키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의사는 그 자리에서 품 안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3번 부른 뒤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중국의 각 신문으로부터 한국인의 애국적 기개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격분한 일본 당국은 군경을 동원하여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습니다. 또한 이 의거는 당시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의 항일 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