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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쓱한호박벌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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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이 독립적으로 이탈리아 영토안에 있는이유?

교황청도 하나의 독립된 국가인데 어떻게 이탈리아 국토 안에 땅을 할애하여 별도의 국가가 이루어 졌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역사적이 이유가 있을 텐데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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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바티칸 시국은 국제법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독립 교황령의 필요에 따라 라테라노조약으로 탄생한 신생국의 이름일 뿐, 교황청을 로마와 별개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로마교황청(Curia Romana)이라고도 하며, 가톨릭교에서는 성청(聖廳)으로 약칭·경칭하기도 한다. 전 세계의 가톨릭 신도를 통치하는 기구로서 독립국가인 바티칸시국의 행정기구도 겸한다.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Paulus Ⅲ)가 ‘이단심문의회(異端審問議會)’란 이름으로 설치한 상설 추기경위원회가 교황청 기구의 시작이다. 그후 교황이 바뀔 때마다 또 다른 기구들이 첨가되었으며, 1588년 교황 식스토 5세(Sixtus 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성성(聖省)이나 관서의 개폐(改廢)를 단행하고, 1917년 교회법전에서 기구로 확정하였다.

    대사회에 적응하고, 교회 쇄신을 논하기 위하여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公議會:1962∼1965)를 계기로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Johannes Paulus Ⅵ)는 교황청 기구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고, 이후 교황청은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개편과 많은 부서들을 신설하였다. 1989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 행정체제에 맞게 모든 부서의 성격과 기능을 명확히 규정하고, 동등한 법률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황청 [Curia, 敎皇廳]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현재 교황은 바티칸에 머물고 있는데 원래 교황청이 위치해 있던 곳은 로마의 라테라노 성당이었습니다.(앞에서 말한 로마 주교의 주교좌 성당을 말합니다)

    라테라노 성당은 줄곧 로마 주교의 주교좌 성당으로써 교황의 거처이자 기독교회의 중심이 되는 성당이었습니다.

    그렇게 천년이 넘도록 라테라노 성당이 교황청으로 이용되었으나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이어진 아비뇽 유수로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70년 가까이 이어진 아비뇽 교황청 시대가 끝나고 교황은 로마로 돌아왔지만 긴 세월 동안 라테라노 성당은 황폐화 되어 교황이 거처로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결국 트라스베레의 산타 마리아 교회와 산타 마리아 마죠레 교회를 거쳐 바티칸에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면서 교황청은 바티칸에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됩니다.

    성 베드로 성당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베드로가 순교했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지어졌고 더불어 그의 무덤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하튼 이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시대에 기존의 성당을 완전히 허물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이 지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9년 2월 11일 로마의 라테라노 궁전에서 무솔리니와 교황청의 가스파리 추기경은 역사적인 조약에 서명을 했는데 라테라노 조약으로 불리는이 조약으로 교황청은 로마 바티칸 시티의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며 주권국가로 새롭게 출발 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0.44 제곱키로메타의 영토를 가진 바티칸은 전세계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됐고 당시 교황이던 비오11세는 이탈리아가 하나님께 돌아왔고 하나님도 이탈리아에 다시 임했다며 환영을 했다고 합니다 무솔리니는이를 계기로 국민적 지지를 확보했고 이탈리아 파시즘을 세계어 알렸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교황청은 원래부터 교황이 머무르는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교황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라테라노 대성당(San Giovanni in Laterano)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1305년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가 프랑스 왕의 강력한 간섭으로 1309년부터 프랑스 아비뇽에 머무는 이른바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 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 교황청이 잠시 프랑스 남부 아비뇽 지역으로 옮겨졌다. 아비뇽 유수를 마치고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왔으나 기존의 라테라노 대성당은 이미 폐허가 돼 있었다. 이 때 교황이 바티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바티칸이 교황청의 본산이 됐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Pope Paul VI, 1897~1978)가 교황청 기구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920~2005)가 각 기구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교황청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바티칸시국은 이탈리아 안에 있지만 교황청은 1929년 이탈리아와 라테라노 협약(Lateran Concordat)을 체결해 독자적인 주권을 인정받았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로마가 성도 교회의 탄생지이자 성도 교회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로마에 위치하게 되었고, 교황청도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교황청을 로마와 별개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바티칸 시국이 로마 시내에 위치할 뿐 아니라, 바티칸이라는 국명 자체가 로마 바티카누스 언덕의 이름에서 따왔고, 역사적으로 교황청의 소재지는 로마로 일컬어지고, 때로는 로마 그 자체가 교황청을 칭해 지기도 하기 때문 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교황청이 이탈리아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역사적인 배경과 이유가 있습니다.

    임시 국민 정부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교황의 권한을 인정하는 것을 약속한 후, 1929년 로마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교황청이 이탈리아의 독립적인 국가로서 인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교황청은 이탈리아 내에서 소재하면서도 외국의 침입에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도록 보장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교황청은 이탈리아 내에 독립적인 국가로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위는 이후의 이탈리아 헌법에서도 인정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황청이 이탈리아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탈리아와 교황청 간의 협상과 조약으로 인해 가능해졌으며, 이는 교황청의 역사와 이탈리아의 정치적, 종교적 배경 등 다양한 역사적인 요인과 상황에서 비롯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바티칸 시국(라틴어: Status Civitatis Vaticanæ, 이탈리아어: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은 이탈리아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위요지 도시국가이다. 바티칸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총 면적은 0.44km2에 인구는 수백 명에 불과한 극소 국가로서 면적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전세계의 주권 국가 중 가장 작다. 서울시 여의도 면적의 대략 6분의 1 정도로 서울시 보라매공원 크기와 비슷하다.

    이전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이 있었으나,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10년 후인 1870년에는 로마와 더불어 나머지 다른 지역도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어 소멸했었다. 바티칸 시국은 이 교황령의 회복을 목표로 한 1929년 2월 11일 라테라노 조약의 체결로 독립을 성취하여 오늘에 이른다.

  • 바티칸 시티는 독립국가인만큼 독자적인 화폐, 방송국, 군대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정부 각료 또한 있습니다. 로마 교황청과 이탈리아는 대립의 역사를 반복하다가, 1929년 라테란 협약에 의해 바티칸 시티가 주권을 인정받고 독립국가를 형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