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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
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23.07.20

성종때 윤씨가 폐비가 된 이유는?

조선 성조시절 윤씨는 후궁이 되고 중전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폐비가 되고 사약을 먹고 죽게 되는데 그녀가 그렇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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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9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폐비윤씨 사건은 성종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윤씨의 왕비로써의 좋지 못한 행동들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이 태어난 이후부터 표면화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윤씨는 질투심이 많아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들을 음해했으며 성종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성종을 비롯하여 세 명의 대비, 후궁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77년 3월 윤씨가 왕과 주변의 후궁들을 독살하기 위해 비상을 숨겨두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윤씨에 대한 폐비 논의가 처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하들의 반대로 폐비는 이루어지 않았고, 윤씨가 별궁에서 근신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이후 윤씨는 둘째 아들 즉 연산군의 동생까지 낳았으나 1479년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또다시 폐비 논의에 휩싸였습니다. 이때 윤씨는 성종의 후궁들과 대비들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었고 성종과의 갈등도 심화된 상태였습니다. 폐비를 반대하는 의견도 거세게 일었으나, 결국 윤씨는 1479년 6월 2일 폐서인 되어 사가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폐비 윤씨는 1482년 8월 16일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폐비윤씨는 성종의 사랑을 뜸뿍 받고 생활했으나 궁중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됩니다. 한명회와 인수대비가 권력에 대한 야욕을 힘없는 폐비윤씨에게 되집어 씌우게 되고 숙의윤씨에 대한 질투로 성종의 미움을 받아 궁궐 밖 사가로 쫓겨나고 후궁들의 모략으로 결국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성종 이후 왕위를 계승한 연산군은 자기 모친인 폐비윤씨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외할머니가 갖고 있던 금삼의 피와 실록을 통해 알게되자 무오사화를 일으켜 피바람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성종이 초기에는 총애했으나, 연산군을 낳고 난 이후부터 소위 '악행'을 저질러 성종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등 도를 넘는 행위를 해서 결국 폐출되었고 좌승지 이세좌로 하여금 폐비 윤씨를 사사토록 하여 사사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폐비 윤씨는 다소 과격한 언행으로 폐출되어 사가로 내쫓겼고 끝내 사약을 받아 숨졌는데

    성종에게 다소 불경한 말과 원망 섞인 말을 했는데 성종을 볼때 낯빛을 바꾸고 발자취를 없애 버리겠다는 말을 했으며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거나 반신불수로 만드는 비법을 적은 책을 상자속에 숨겨두었다가 대비에게 발각, 또 독약인 비상을 묻힌 곶감을 가지고 있다 들키거나 나무패의 말뚝을 박는 등의 주술행위를 저질렀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씨가 입궐한 다음 해인 1474년 4월 성종의 첫 번째 왕비였던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가 19세의 나이로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성종은 대왕대비(大王大妃)였던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1476년 7월 11일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삼으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에 따라 윤씨는 같은 해 8월 9일 인정전(仁政殿)에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아버지 윤기견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촌되었다. 당시 윤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왕비가 된 후 4개월 후인 1476년 11월 7일에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을 낳았다.


    윤씨의 좋지 못한 행동들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이 태어난 이후부터 나타났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윤씨는 질투심이 많아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들을 음해했으며 성종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종을 비롯하여 세 명의 대비, 후궁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77년 3월 윤씨가 왕과 주변의 후궁들을 독살하기 위해 비상(砒霜)을 숨겨두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윤씨에 대한 폐비 논의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신하들의 반대로 폐비는 이루어지 않았고, 윤씨가 별궁에서 근신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윤씨는 둘째 아들 즉 연산군의 동생까지 낳았으나 1479년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또다시 폐비 논의에 휩싸였다. 이때 윤씨는 성종의 후궁들과 대비들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었고 성종과의 갈등도 심화된 상태였다. 폐비를 반대하는 의견도 거세게 일었으나, 결국 윤씨는 1479년 6월 2일 폐서인(廢庶人) 되어 사가로 쫓겨났다.


    이후 연산군의 세자책봉이 거론되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성종은 훗날 폐비 윤씨로 인한 문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였다. 성종은 곧이어 삼정승과 6조의 판서 및 대간(臺諫)들을 불러 폐비윤씨의 처분에 대해 논하였고, 결국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폐비 윤씨는 1482년 8월 16일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폐비윤씨사사사건)

    출처 :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두번째 부인으로 투기와 저주 행위를 일삼고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윤씨 일가의 세력 확장 등을 꾀하다가 폐위되었습니다.

    폐비 윤씨가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로

    연산군이 즉위하여 폐비 윤씨의 사간으로 인해 폭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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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씨폐비전>을 보면 윤씨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음모로 그렇게 했다고 나옵니다. 근데 이거는 윤씨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조실록>에서는 윤씨가 잘못해서 왕과의 관계가 안좋았다는 식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의 확실시 되는건 아이를 낳고 왕하고 사이도 좋지 않았고 시기 질투하는 세력들로 인해 그렇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폐비 윤씨는 1479년(성종 10)에 투기심으로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과 왕비로서의 실덕(失德)함을 이유로 폐위되어 사가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폐위가 끝이 아닌 1482년(성종 13)에 윤씨의 죄를 다시 의논하여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종이 중전의 방에 갔는데,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와 독극물이 묻은 곶감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성종이 윤씨를 폐위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했습니다. 이후 사람을 해하는 방법 등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는 등의 행위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성종은 윤씨를 폐위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