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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가오리188
즐거운가오리18823.05.22

1920년대 일본이 산미증식계획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1920년대 일본이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하여

우리나라의 쌀들을 수탈해갔는데

산미증식계획은 어떤 사회적 배경으로 시행한 것인가요?

전쟁준비의 일환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시행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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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2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는 자본의 급속한 축적으로 농민의 대량 이농과 도시 노동자의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매년 60~70만에 달하는 인구 증가가 발생하였다. 이는 일시적으로 식량수급을 악화시켜 1918년에는 ‘쌀소동[米騷動]’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의 식량증산을 강행하여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확보함으로써 자국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려 하였으며, 이러한 방침에 따라 입안, 실시된 것이 산미증식계획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미증식계획 [産米增殖計畵]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산미증식계획은 일제가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정책입니다.

    일본자본주의의 존립에 필수적인 저임금 유지를 위한 미가정책, 식량대책이자 조선을 식량 공급기지로 만들려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는 자본의 급속한 축적으로 농민의 대량 이동과 도시 노동자의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이 나타나며 매년60~70만에 달하는 인구 증가가 발생합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식량수급을 악화시켜 1918년 쌀소동이 발생,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의 식량증산을 강행해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확보함으로 자국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려 했고 이러한 방침에 따라 입안, 실시된 것이 산미증식계획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산미증식계획은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쌀을 많이 생산해서 일본 본토로 가져가려는 목적으로 만든 정책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쌀농사 말고 다른 농사를 짓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죠.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때는 자기가 먹을 잡곡이나 채소를 키우기도 하고, 팔아서 돈을 벌기 좋은 상품작물(담배, 목화 등)을 키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제는 쌀을 최대한 많이 생산해서 가져가야 하므로 다른 농작물을 키우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강제로 쌀만 키우게 되는 것이죠.

    대공황은 1920년대 후반에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경제 위기입니다. 세계 전체의 경제가 위기로 휘청이면서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대공황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당연히 사람들의 소득이 떨어집니다. 돈이 없으니 먹고 사는 것을 아끼게 되고, 그래서 쌀의 소비량도 줄어들죠. 쌀을 먹을 돈으로 더 싼 잡곡을 사먹으면 돈을 더 아낄 수 있잖아요. 산미증식계획으로 쌀은 많이 생산했는데 대공황 때문에 소비량이 줄어들었으니 쌀값이 폭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작농업을 강요받은 조선의 농민들은 쌀만 팔아서 먹고살았는데 쌀값이 폭락했으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죠.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 산미증식계획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 내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목적을 세우고 시행한 정책이다. 1920년대 이후 총 3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출처:우리역사넷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업 부문의 식민지적 재편을 완료한 일본 제국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성장한 일본 독점자본의 요구에 부응,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삼기 위해 1920년부터 3차에 걸쳐 추진한 식민지 경제정책입니다.


    제1차 계획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의 5개년 계획이었습니다. 제2차 계획은 1926년부터 1935년까지의 10개년 계획이었다. 그런데 10개년 계획이 1934년에 중단된 것은 조선미의 대일수출 증대로 일본 농업이 위기에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1937년, 일본은 중국본토 침략을 개시하였습니다. 군량미 수탈을 위해 다시 조선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1940년 다시 산미증식계획을 수립, 추진하였습니다. 이것이 전시 중에 실시된 제3차 산미증식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