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 목적과 방법, 결과 등이 궁금합니다.
일본은 1910년대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도시에 몰려 식량 조달에 큰 차질이 빚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 목적과 방법, 결과 등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는 자본의 급속한 축적으로 농민의 대량 이농과 도시 노동자의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이 나타났으며 매년 60~70만에 달하는 인구 증가가 발생합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식량수급을 악화시켜 1918년 쌀소동이 발생,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의 식량증산을 강행해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확보함으로써 자국의 식량부족을 해결하려했습니다.
총 두차례 시행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최초 30년 계획으로 총 80만 정보의 토지개량을 계획하고 먼저 1차로 15년동안 총공사비 2억 4000만원을 들여 42만 7000정보를 개량하고 연간 약 900만석을 증수, 그 중 460만석을 일본으로 가져가려하나 1925년까지 공사착수 예정면적의 59%인 9만 8000정보 가량이 착수되고 준공 예정면적의 62%인 7만 6000정보가 준공, 농사개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불황으로 사업자금 조달이 어려웠고, 특수회사가 설치되지않은점, 토지개량에 의한 수익보다 토지 소유에 의한 수익이 높았던 점 , 농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던 점입니다.
이에 일제는 정부 알선자금의 비중을 대폭 높이고 사업 대행기관과 추진기관을 정비해 1926년부터 12년동안 총공사비 3억 3000만원을 들여 35만 정보를 개량해 820만 석을 증수하려는 제 2기 계획을 시행합니다.
그럼에도 예정면적의 47%인 16만 5000정보를 개량할수 있었을 뿐 2차 계획은 1930년대 실적이 극히 저조했는데 이는 공황기의 쌀 가격 하락으로 인한 수리조합의 경영 악화, 정부 알선자금의 급격한 감소때문으로 결국 산미증식계획은 농업공황으로 인한 쌀 가격의 폭락, 조선 쌀의 수출에 따른 일본의 농촌경제 악화로 1934년 중단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산미증식계획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 내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목적을 세우고 시행한 정책이다. 1920년대 이후 총 3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제1차 계획’은 1920~1925년에 실시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畵), ‘제2차 계획’은 1926~1934년에 실시된 ‘산미증식갱신계획(産米增殖更新計畵)’, ‘제3차 계획’은 1940~1945년에 실시된 ‘조선증미계획(朝鮮增米計畵)’이라고 한다. 이것을 총괄하여 일반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이라고 부른다.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식민지 조선의 농업생산 체제는 벼농사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쌀의 반출이 늘어나면서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오히려 감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한국인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또한 대지주들은 쌀 생산을 통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토지소유를 확장하는데 주력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은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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