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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밝은큰고니2723.12.07

고려시대에 살던 인물인 강조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려시대에 목종을 폐위시키고 결국 죽여 버린 다음 거란과의 전쟁에서 잡혀서 거란왕의 회유를 물리치고 죽은 강조는 역신이라고 평가해야 할까요 충신이라고 평가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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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강조를 '반역자 열전'에 넣은 반면, 다른 일부는 그를 충신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강조가 요나라 성종 앞에서 행한 모습을 보았을 때, 그가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용맹함과 애국심은 높이 살 만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기에 좋은 명분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수많은 군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행동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 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한 것을 보면 충신으로 평가하는쪽이 맞는것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모시던 왕을 폐위시켰으므로 여기서는 역적이라 볼 수 있지만, 거란 전쟁에서 활약하였고 포로로 잡혔을 때 대요(거란) 성종 야율융서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단짠단짠'의 신하였다 즉, 그저 좋게 평가할 수도, 그저 나쁘게 평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10년(현종 1) 목종은 대량원군 즉 자신의 사촌동생을 왕위에 앉히고자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를 궁으로 부릅니다. 왜냐하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불륜관계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힐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의 부릅에 강조는 병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왕이 죽었다는 거짓보고를 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강조는 개경으로 향했고 김치양과 아들을 죽이고 천추태후와 목종은 유배를 보냈습니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목종은 시해됩니다. 강조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대량원군을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비록 목종을 폐의시키고 시해한 것은 불충이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행위가 아니었기에 쿠데타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역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결국 강조정변이 원인이 되어 거란의 2차 침략으로 이어집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사 반역열전에 그의 이름이 올라와있습니다.

    정변을 일으켜 임금을 폐위, 시해했으며 목종에게 멋대로 시호, 묘효, 능호를 올린 것 또한 문제였습니다.

    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에서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조를 위인으로 대우하지 않았고 고려사에서 죽을 때 비로소 목종의 혼령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식의 서술이 추가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와 같은 경우에는 여러가지 기록에서 충신으로 보입니다. 제2차 여요전쟁이 일어나자 최고 권력자임에도 스스로 전장에 나아가 싸웠으며,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참패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된 후 요성종에게 직접 투항도 권유받고 살을 베어내는 고문도 당했지만 끝내 자신은 고려의 신하라며 투항을 거부하고, 자신과 반대로 항복한 이현운을 발로 차며 욕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