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역사가들은 강조를 '반역자 열전'에 넣은 반면, 다른 일부는 그를 충신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강조가 요나라 성종 앞에서 행한 모습을 보았을 때, 그가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용맹함과 애국심은 높이 살 만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기에 좋은 명분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수많은 군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행동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1010년(현종 1) 목종은 대량원군 즉 자신의 사촌동생을 왕위에 앉히고자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를 궁으로 부릅니다. 왜냐하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불륜관계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힐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의 부릅에 강조는 병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왕이 죽었다는 거짓보고를 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강조는 개경으로 향했고 김치양과 아들을 죽이고 천추태후와 목종은 유배를 보냈습니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목종은 시해됩니다. 강조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대량원군을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비록 목종을 폐의시키고 시해한 것은 불충이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행위가 아니었기에 쿠데타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역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결국 강조정변이 원인이 되어 거란의 2차 침략으로 이어집니다.
강조와 같은 경우에는 여러가지 기록에서 충신으로 보입니다. 제2차 여요전쟁이 일어나자 최고 권력자임에도 스스로 전장에 나아가 싸웠으며,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참패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된 후 요성종에게 직접 투항도 권유받고 살을 베어내는 고문도 당했지만 끝내 자신은 고려의 신하라며 투항을 거부하고, 자신과 반대로 항복한 이현운을 발로 차며 욕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