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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소보로크림빵
단팥소보로크림빵23.03.26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안용복장군은 누구인가요?

부산시 수영구에 있는 수영사저공원에는 수강사라는 안용복장군의 위패를 보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는 동상까지 세우고 위패를 모시는 사당까지 세워서 넋을 기리는 이유가 무엇이며 안용복장군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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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2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안용복장군은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일본에 확인시켰습니다.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수군에 들어가 능로군으로 복무했으며, 왜관에 자주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혔습니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어민이 울릉도에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부하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때에도 바쿠후에게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주장하여 바쿠후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받았으나 귀국 도중 나가사키에서 쓰시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겼다고합니다. 같은 해 9월 쓰시마도주는 예조에 서계를 보내 울릉도(일본명은 다케시마)에서 조선어민의 고기잡이를 금지시킬 것을 요청했고 이에 조선정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외딴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공도정책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요청한 예조복서를 보냈습니다. 1696년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다시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마쓰시마까지 추격하여 영토 침입을 꾸짖었으며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 칭하고 하쿠슈 태수로부터 영토침입에 대한 사과를 받고 귀국했다고합니다. 귀국 후 사사로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영의정 남구만의 도움으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고 1697년 대마도주에서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냄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은 일단락되었다고합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입니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강한 적에 대항하였기때문이지요. 왜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였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하는데 앞장서서 노력했기에 울릉도에는 안용복을 기리는 안용복 동상과 안용복 장군 충혼비 그리고 추모 사당이 있습니다. 또한 그의 고향인 부산에는 수영구에 사당이 있습니다. 이 사당의 이름이 바로 수강사. 수강사 내에는 그를 모시는 위패와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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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안용복 장군은 노비의 출신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인물입니다.말하지면 민간 외교관이라 할수도있고 일본의 해역침범에 대항한 장군이라고도 할수 있겠습니다.

    조선시대 태종당시 나라에서는 죄인들이 섬으로 도망치는것과 섬에 멀리 사는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거두기 쉽지 않은것을 이유로 섬에 사는것을 금지하고 먼바다에 나가는것또한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에 따라 일본 왜구들은 자유롭게 한국바다 울릉도 독도등지에서 불법 조업을 하였습니다.

    그때 울릉도에 조업갔던 안용복이 일본인들의 불법조업을 보고 그에 분노하여 노비의 신분으로도 거침없이 싸우고 저항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 안용복은 두번 일본으로 다녀왔는데 첫번째는 납치였고 두번째는 직접 방문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도 별 관심이 없던 울릉도와 독도의 영토분쟁을 안영복이 적극적으로 싸움으로 인해 울릉도독도가 조선땅이라는 기록을 일본 중앙정부에서도 받게 되고 조선정부에서도 알게되면서 숙종실록에 기록으로 남겨됩니다. 이 과정에서 울릉도 독도가 조선땅이라는 것을 더 공고히 하고 알려졌으며 다만 바다로 나가지 말라는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2년형을 억울하게 살게됩니다.

    하지만 안용복의 기개가 감히 놀라워 안용복은 형을 살고 나온후에 다시 울릉도에 일본인들이 오지 않나 감시를 하러 갔고 그때 발견한 일본인들을 크게 호통치며 일본까지 쫓아가게 됩니다. 스스로 울릉도 독고 책임자관리임을 자처하면서 일본에가서 직접 조선땅입을 알리고 온것이지요.

    이일로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는것을 일본 에도막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 모든일을 노비였던 안용복이 해냄으로서 안용복장군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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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안용복은 조선 후기 어부이다.

    두 차례 일본으로 가서 호키주 태수와

    에도 막부를 상대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일본의 불법 고기잡이에 항의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조정으로부터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다는 범죄자로 비난을 받았으나, 18세기 이후 재조명되어 근대에는

    애국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강호 수역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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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숙종 시절에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고

    일본 막부로 부터 공인하도록 활약하던 민간 외교인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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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장군은 조선 숙종시대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영의 수군으로 당시 왜인들이 우리의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자 수차례에 걸쳐 그들과 맞서 싸웠으며 동료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시키고 일본의 에도막부로부터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아 우리의 영토를 수호하신 분입니다. 후에 후손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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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용복은 조선 후기 어부인데, 두 차례 일본으로 가서 호키주 태수와 에도 막부를 상대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일본의 불법 고기잡이에 항의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eh/view.do?levelId=eh_n0540_0010&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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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용복(安龍福)은 조선시대의 장군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활동했습니다.


    안용복은 조선 제12대 군주인 세조 때에 삼별초(三別抄) 사건이 일어난 때,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병력을 키우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 세조의 아들인 인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안용복은 인조의 대신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안용복은 1592년 일본의 침략이 일어난 후 발생한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군사 재능과 전략적인 사고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인조의 후궁들을 안전하게 대구로 대피시키는 등 국민의 안전과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안용복의 공을 인정받아, 그는 조선시대의 명장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안용복은 인조 5년(1622년)에는 조선과 일본의 상호 무역을 담당하는 통사(通事)로 임명되어 조선의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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