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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친칠라280
대단한친칠라28023.03.25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이 다시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은 정묘호란에서 패배한 후 청나라를 종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다시 조선을 침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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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2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정묘호란은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 명나라를 가까이 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결국 대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청과 싸우자는 척화주전론으로 기울어집니다. 이에 대해 청이 가만있을리 없죠. 청은 다시 침략해 왔고,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합니다(1636).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이죠.

    결국 병자호란은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추라 하였으나, 조선은 야만족으로 멸시해 온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해서 일어났어났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바꾸고 명을 완전히 소멸시키기위해 후방인 조선을 안정시킬필요가 있었기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거부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습니다.친명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견제하게 되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으로 일으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청나라와 전쟁으로

    청나라는 이전 국가 후금입니다.

    후금은 나라가 커지자 명나라와

    전쟁을 하였고 결국 명나라는 사라지고 후금이 남자 후금은 중국 황제국으로

    선포하고 국호를 청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자 청나라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인조에게 명나라를 섬기지 말고

    청나라를 섬기라 하였고 인조는 이를

    거부하자 청나라는 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해 1636년 12월 2일

    청나라군이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우자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조선과 후금은 강화를 맺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으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친명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경계하게 되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후금은 양국 관계를 형제지국의대등한 관계에서 군신지의로 고칠것과 황금, 백금 1만냥, 전마 3000필 등 세폐와 정병 3만을 요구합니다.

    1636년 2월 용골대 , 마부태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라를 강요하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 할 의사를 굳혔습니다.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 대신,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나 조선은 주화론자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홍타이지는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조세를 바치며 침략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그동안 조선에 대한 침략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침략을 합리화하고, 조선을 억압하고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습니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조선의 내정과 군사에 관여하는 것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저항과 대비를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압박을 계속하면서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에 침입하였습니다.

    병자호란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청나라는 조선이 침략적인 대외정책을 전개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으며, 조선의 외교적인 수단을 제한하고, 그들의 관심사에 따라 조정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이 대외적으로 약화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청나라는 병자호란으로 조선에 대한 침입을 시도하고, 이를 계기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인조 + 서인정권이 "친명배금정책"을 펴서 일어났습니다.

    즉, 명을 섬기고 후금을 배척하는 외교정책인데 이가 후금의 반발을 샀던 것입니다.


    또한,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북방이 취약해져있었기 때문에 침입이 용이했었던 것도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습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습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습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후금이 강성해지자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는데,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 이를 거절하자 청태종이 손수 12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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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예로부터 명 나라를 섬겨 왔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로부터 임진왜란에 도움으로 조선을 도와주어 조선은 명나라와 의리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은 당시 명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후금이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를 섬기라 하니 인조는 이런 요구조건을 거부하지요. 이런 이유로 후금은 조선을 쳐들어 오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이 다시 일어나게된 이유는

    청나라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서 명나라를 섬기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를 거부하자

    청나라가 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조선을 침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군이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국제정세는 요동칩니다. 명의 국력이 떨어지고 여진족이 급성장했습니다.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조선에 도움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임진왜란 후 명의 일부가 평안도에 남아있자 후금이 이를 빌미로 조선을 쳐들어 온 것이 정묘호란입니다. 이때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고 명과의 군신관계를 끊는 것을 조건으로 화의를 합니다.

    하지만 조선이 명과 관계를 계속하자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꾼 상태에서 재침한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인조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다 난을 맞이한 것입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항복하는데 송파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굴욕을 당하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습니다. 이는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기까지 계속되었으니 350여년 이상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묘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첫번째 만주족 침입 전쟁입니다. 만주족은 조선에 침입하여 수도인 한양(서울)을 점령하고, 조선의 왕족과 국민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정묘호란 이후 7년 후인 1643년에 일어난 두번째 만주족 침입 전쟁입니다. 이전의 정묘호란에서 만주족은 조선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다시 한번 조선에 침입하였습니다.


    병자호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만주족의 국력 확대와 군사적인 대비 부족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만주족은 국력을 더욱 강화시키고, 조선의 군사적 대비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분열과 부패가 심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만주족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할 수 없었으며, 병자호란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대비와 군사력 회복, 정치적인 안정화 등을 필요로 하였지만, 그러한 조치들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