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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콜리160
색다른콜리16023.08.23

한국의 보부상은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요?

지금은 보부상이라 하면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생각나는데요.

한국이 예전부터 보부상이 많았고, 마을들을 오고가면서 물건들을 팔거나,

양반집에 들어가 하룻밤 묵으며 이야기거리를 제공해 줬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근데 한국이 산지도 많고, 호랑이라든지 위험한 동물들도 많았을텐데

어떻게 해서 보부상이 활동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언제부터 보부상이 있었는지도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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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등 전통사회에서 장시를 중심으로 지게나 봇짐으로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며 활동했던 전문 행상인들이나, 이들이 속한 단체를 말합니다.

    그 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부상은 삼국시대 이래 농업생산자·가내 수공업자·시장상인 등과 소비자 사이의 물물 교환을 매개하던 행상인이 그 원형일 것으로 생각되고는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공양왕 때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했던 기록이 정사에 등장합니다. 조선 말기 고종 때 발행된 혜상공국서와 완문의 기록에 따르면 보부상들은 자신들의 시작을 기자조선 때 부상들을 동원 느티나무를 심게한데서 유래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위화도 회군 때 보부상의 회두인 토산인 백달원이 800여 명의 보부상 회원들을 동원해 군량미를 운반해 줬는데, 왕이 된 이성계가 그들의 공로를 기억하여 각종 행상권을 전담시켰다고 합니다. 그후 그들을 단속하고 지원할 '보부청'을 조선 조정이 설치하면서 공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건국 당시 부상 백달원이 석왕사를 증축할 때 도움을 주고 이성계가 여진족을 토벌하다 부상입었을 때 보부상이 도움을 주었다고 하며 그 대가로 이성계는 보부상 조직을 허락하고 행상권을 그들에게 전담했다고 합니다.

    이후 보부상들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 수천명이 참가해 식량과 무기를 조선군에 보급해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공헌했다고 하며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으로 식향을 운반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이 후 어염, 목기, 수철 등 다섯가지 품목의 전매권을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당대 자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 보부상이라는 표현도 19세기 이후 등장합니다.

    이에 따라 이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시장이 전국에 개설되고 상업이 발달한 18세기부터로 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근대사회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했던 전문상인. 봇짐장수인 보상과 등짐장수인 부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


    본래는 별개의 조직체였는데, 1883년(고종 20)에 설치된 혜상공국(惠商公局) 아래 합쳐지면서 「보부상」으로 통틀어 일컫게 되었다. 보상은 주로 정교한 세공품이나 값비싼 사치품을 취급한 반면, 부상은 조잡한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취급했다. 보상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팔았고, 부상은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대개 1일 왕복의 노정을 표준삼아 형성된 시장망을 돌면서 각 지방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보부상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부상단(負商團)이 조직된 것은 조선 초로서, 이에 관해서는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에 공헌했기 때문에 그 조직을 허용했다는 설과, 이와는 달리 상류계층과 무뢰한의 탐욕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했다는 설이 있다. 보상단(補商團)에 관해서는 79년(고종 19)에 발표된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에 의해 알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 이전부터 지역마다 각기 정해진 규율과 두령인 접장(接長)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보부상은 국가의 일정한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에 동원되어 정치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수천 명의 부상이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을 뿐 아니라 전투에도 직접 참여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공헌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부상들이 식량을 운반해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정부에서는 이들의 요구대로 생선·소금·목기·토기·수철기(水鐵器)에 대한 전매권을 허락했다.


    66년 병인양요 때는 전국의 보부상이 동원되어 프랑스군을 무찔렀으며, 82년에는 민영익(閔泳翊)이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고 경기도와 강원도의 보부상을 이끌고 서울로 침입한다는 소문이 있어 도성 내에 큰 혼란이 일기도 했다. 또 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보부상은 정부군에 합세하여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주축이 되었던 것은 충청우도(忠淸右道) 저산팔구(苧産八區)(모시를 생산하는 8읍 : 부여·정산(定山)·홍산(鴻山)·임천·한산·비인·남포·서천)의 보부상들이었다. 그 후 황국협회에 속하기도 했다가 여러 변천과정을 겪은 끝에, 일제강점과 더불어 일제의 보부상 말살정책에 의해 거의 소멸되었다

    출처 : 한국고중세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