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에서 유학할때 이런분들 많이 만났지요!~
정말 우리나라 최초의 외화벌이를 위해 박정희 정권때 시작되었지요ㅡ
광부로 오셨던분들은 광산에서 열악한 환경속에서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열심으로 맡은바 일을 잘 해내셨지요. 영화:국제시장에서도 나왔지요...ㅋ
간호사로 오셨던분들도 잃지않는 미소와 성싱함으로 독일병원에서 없어서는 안될 일꾼으로 자리잡았어요
특히 시체를 닦거나 움직일수 없는 환자들의 똥 오줌을 받아내는등... 궂은일을 도맡아 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아 독일사람들이 이렇게 평했습니다. " 일꾼을 불렀는데 사람이 왔구나" 그만큼 인정받았다는 거지요!~~
파독 광부, 간호사 를 위로하기 위해 2013넌(50주년)에 아는 목사님이 쾰른에서 헹사를 하셨는데, 한복을 선물하고 음악회를 했는데 그분들이 너무 감사해하고 눈물짓는 모습이 아련합니다ㅡ
아무튼 이분들의 희생이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밑걸음이 됐다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0년대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지향정책은 농촌 붕괴현상을 초래, 그 결과 막대한 실업과 외화 부족현상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한국정부는 광부와 간호사와 같은 노동력의 해외송출을 추진, 반면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사태를 겪게 되어 많은 취업의 기회가 보장된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그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1963년 파독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여명이 지원할 정도로 당시 한국의 실업난은 심각했고 3년 계약의 파독광부들에게는 매월 600마르크의 높은 수입이 보장되어 많은 한국인들이 독일로 가기를 희망하나, 많은 사람들이 광산 노동의 경험이 없던 초심자였으므로 크고 작은 부상과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파독 간호사로 재직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본 간호가 주요 업무였다고 하는데, 대변 치우기와 식사수발 등이었고, 무시와 차별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하며, 광부 역시 지하 1000m가 넘은 석탄광산 막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실업문제 해결과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한국에서 독일(서독)으로 파견한 7900여명의 광부들이 있었습니다. 파독 간호사 간호조무사들도 있었습니다. 독일병원에서는 자격을 갖춘 한국인 간호사 및 간호보조사의 고용을 위한 프로그램은 1971년 7월 26일 독일연방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 사이의 협정이었습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3년 근무 후 귀국이 원칙이었습니다. 광부들은 3년이 지나면 엄격히 적용하여 50명 중 6명만 남기고 44명이 귀국했으나 간호사들은 탄력적으로 적용했으며 간호사와 결혼하면 5년을 연장할 수 있어서 쉬는 날에는 광부들이 옷을 차려입고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차츰 좋아졌으나 처음에는 노동강도가 너무 세서 힘들게 일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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