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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도라지볶음
무거운도라지볶음23.09.27

김홍집은 친일파로 보는 것이 맞을가요

제1차 갑오개혁때 김홍집 내각은 일본이 세운건가요 조선이 세운건가요? 김홍집이 친일파라면 군국기무처가 동학 농민 운동 요구를 반영해서 개혁을 추진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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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2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말기 외세 침략의 구실이 된 여러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때 실무를 담당한 김홍집은 사실상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에 따라 구성된 친일 내각의 수반일뿐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김홍집은 매국적 친일파로 가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개화라는 도도한 흐름과 내우외환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권력 다툼만 하던 그때에 누군가는 외교 실무를 담당해야 했고,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정치외교가로서 김홍집은 최고의 인물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그 끝은 불행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조선은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 격동의 시기에 주목받는 인물이 3명 있는데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이하응 총리대신 김홍집입니다. 특히 김홍집은 영의정이었고 내각이 구성되었을 때 총리대신으로 부정적 평가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세의 압력 속에서 난세를 이끈 인물로 재평가 되고 있습니다. 김홍집은 청일전쟁 갑오개혁 동학봉기와 아관파천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번이나 총리대신직을 맡아 국정을 총괄했던 개혁적인 인물이었지만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식재판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군중에 의해 시신이 짓이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시대를 잘못만나서 그렇지 중심을 집고 외세에 굴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가진 인물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홍집 일행은 일본의 철도와 자동차, 위생상태 등을 살피고 일본의 발전상에 크게 놀랐고 일본이 제안하는 근대화 계획에 동조하게 된다. 이는 나중에 그를 친일파 로 분류하는 원인이 되었고 1895년 10월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구성한 내각에 김홍집도 참여했는데 (제4차 김홍집 내각때 참여한 인물이 친일 성향이 강한 조희연, 유길준등 이였습니다. 개혁을 요구는 했지만 그것은 일본의 눈치를 보면서 한 개혁이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개혁이 아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