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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12.13

당태종 이세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보다 2대 황제인 당태종 이세민이 더 유명한 것 같은데요.

당태종 이세민이 무엇 때문에 많이 알려져 있는 건가요?

이름은 익숙한데 업적이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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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626년에 즉위한 후 24년간 재위했습니다 (627-649). 이세민은 중국역사상 보기드문 타천하도 할 줄 알고, 치천하도 할 줄아는 명군이었다고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 의 두 형제를 죽이고, 부친을 퇴위시켰고, 여러 아들을 죽게 만들었으며 즉위후, 다시 일련의 개혁조치를 통하여, 역사상 유명한 '정관지치'를 실현했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세민은 당나라의 제2대 황제로아버지는 이연(李淵)이고 어머니는 두(竇)씨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주(英主)로 알려져 있으며, 북방민족의 피가 섞인 무인(武人)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수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거병,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건립했습니다. 왕위 쟁탈전을 치르면서 무덕(武德) 9년(626)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습니다. 수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명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심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기에 힘썼습니다. 그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송받았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기에 유명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26년 7월3일 형과 아우를 죽인 '현무문의 변'으로 태자가 되다

    “대형(大兄)!” 벽력처럼 부르짖는 소리에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신무장을 하고 자신들을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있는 둘째를 본 맏형은 어쩔 줄을 몰랐고, 옆에 있던 넷째가 재빨리 활을 들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려, 세 발이나 목표를 빗나갔다. 그 사이에 둘째가 침착하게 쏜 화살이, 맏형의 목을 꿰뚫었다.
    그의 즉위 과정은 지저분했으나 통치는 길이 빛을 남겼다

    친형을 살해한 둘째가 고함을 지르며 말을 탄 채 달려들자, 그를 따르는 부하들도 칼을 뽑고, 활을 쏘았다. 넷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지만 이를 부드득 갈며 다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데려온 호위병들과 둘째의 병사들이 뒤엉켜져 싸우는 소리가 어스름한 새벽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 순간 못 믿을 일이 일어났다. 둘째가 타고 있던 말이 사납게 날뛰는 바람에 둘째가 그만 땅바닥에 굴러 떨어진 것이다.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귀신 같은 모습의 넷째가 달려왔다. 주먹다짐이 벌어지고, 어느새 넷째는 둘째의 몸 위에 올라타서는 있는 힘을 다해 형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용맹함이 짝이 없는 용사, 울지경덕이 달려들고 있었다. 넷째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 했지만, 울지경덕의 화살이 더 빨랐다. 얼마 후. 울지경덕은 두 형제의 목을 잘라서 높이 휘두르며 싸우고 있던 적병에게 투항을 종용했다. 차차 싸움이 그치고, 아직도 아픈 목을 어루만지며, 둘째는 자기편 병사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세민, 28세. 이제 천하가 그의 손 안에 있었다.

    유방과 조조의 기량을 한 몸에 갖춘 인물

    한, 송, 명, 청···. 오랜 중국사에 수많은 왕조가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그 중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왕조는 당이다. 원이나 청에 비해 “한족의 왕조”라는 정체성이 있고, 송나라 못지않은 문물을 이룩한 데다 명나라 이상의 국위를 떨쳐, 당시 이슬람제국과 함께 세계 2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왕조가 당이기 때문이다. 그런 당나라를 만든 주인공이 다름 아닌 태종 이세민이다. 그의 연호인 ‘정관(貞觀)’에서 딴 “정관의 치”는 오랫동안 신화적인 이상정치의 시대인 “삼대(三代)” 다음 가는 최고의 태평성대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626년 7월 2일 벌어지고, 7월 5일 이세민이 황태자에 책봉됨으로써 마무리되는 “현무문의 변”이 필요했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의 둘째아들이었던 이세민은 여기서 태자인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죽이고 부왕을 위협하여 태자 자리를 쟁취했다.

    이세민은 599년 1월 23일 태어났다. 아버지 이연은 북주와 수나라에서 대대로 대장군을 지내고 당국공으로 봉해진(당이라는 국호는 여기서 나왔다) 명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두씨는 선비족의 귀족이었다. 16세에 장교가 되어 18세부터 십 년이 넘게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617년, 아버지를 따라 태원 지방에 있던 이세민은 수양제의 실정으로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지는 상황에서 거병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당이 천하를 차지하기까지 7년 동안 크게 여섯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이세민이 그 중 네 차례를 이끌어 모두 승리하였다. 맏형 이건성도 앉아만 있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형제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적진에 뛰어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당의 건국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세민이었다. 그러나 적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에 밀려 황태자 자리는 이건성에게 돌아갔고, 이세민은 진왕에 봉해졌다.

    나중에 다소 미화되었을지 몰라도, 이세민의 인물됨은 실로 출중했다. 어떤 사람은 그를 “한고조 유방과 위무제 조조의 기량을 한 몸에 갖췄다”고 평가했다. 유방의 호탕함과 뛰어난 용인술, 거기에 조조의 지모와 용병술을 갖췄다면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지도자가 아닌가. 그런 인물이 옆에 있으니 황태자 이건성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세민 역시 그만한 기량을 갖고 옥좌가 탐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상대를 헐뜯고 모함하는 한편 장군들에서 후궁들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갖은 애를 썼다. 태자의 신분이면서도 불리해 보이던 이건성이었으나 넷째 이원길과 결탁하면서는 오히려 이세민이 불리해지는 듯했다. 마침내 이원길이 이세민 편의 핵심 세력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아버지인 황제의 허락까지 받아내자, 이세민은 더 기다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626년 7월 1일에 “태자와 원길이가 부황의 후궁들과 은밀한 관계입니다”는 밀고를 하고, 이에 노한 황제가 두 사람을 궁궐로 불러들인 것을 기회로 궁궐의 현무문에서 두 사람을 습격해 죽였던 것이다.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 한다.

    정관의 치

    형제의 피를 뒤집어쓰며 옥좌에 앉은 당태종 이세민. 그러나 그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곧잘 평가되는 이유는 그런 과정을 거쳤을지언정 훌륭한 정치를 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우선 교만하지 않았다. 28세라는 한창 나이에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음을 턱 놓고 권력과 사치에 잠길 만도 하건만, 태종은 반대로 근검절약을 생활화하고 황족과 대신들도 이를 본받도록 했다. 또 사람 쓰는 일에 신중했고 교묘했다. 한고조나 명태조는 천하를 손에 넣기까지 함께 애써온 개국공신들을 남김없이 숙청해서 그들이 황실을 위협하지 못하게 했다. 반대로 조선의 세조는 공신들을 극진히 대접하다가 훈구파들이 좌지우지하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당태종은 공신들을 변함없이 존중하는 한편, 문벌은 약해도 실력이 뛰어난 인재들을 계속 발굴해서 원로 공신들과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태종은 애써 천하를 통일했으나 2대만에 멸망한 수나라의 예를 거울삼고, 집권 과정에서 흘린 형제의 피를 잊을 수 있도록 진정한 제왕의 정치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그는 철이 들 무렵부터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무인의 삶을 살았으나, 태자로 책봉되고부터는 당대의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책에 묻혀서 살았다. “천하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만인의 것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을 정치의 근본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황제가 된 뒤에도 자신이 혹시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가차없이 지적하도록 간언을 장려했다. 여기서 가장 신랄하고 적절한 간언을 하여 ‘쓴소리의 황제’로 올라선 사람이 위징이다. 위징은 본래 이건성 쪽 사람이었으나, 당태종은 그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통렬히 꾸짖도록 했던 것이다. 한 번은 태종도 위징의 꼬장꼬장함에 진력이 나서 “저 늙은이를 죽이고 말 테다!”고 소리쳤지만, 황후의 간언을 듣고 취소했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대의에 따르는 황제, 자신의 열락보다 백성의 살림살이에 더 관심을 가지는 황제. 남북조 시대와 수양제 시대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자기 배를 불리는 일에만 급급한 왕후귀족들을 질리도록 봐온 백성들에게 이는 가뭄 끝의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

    당태종은 내치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외치에도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한나라 말기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을 유린했으며, 특히 최근 백여년 간은 돌궐의 세력이 막강했다. 부황인 당고조도 돌궐에 사실상 신하 노릇을 하며 몸을 낮춰야 했다. 그러나 당태종은 돌궐의 분열을 최대한 유도한 끝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격, 힐리가한을 포로로 잡아버렸다. 또 서방의 토욕혼, 서남의 토번 역시 무찔렀고, 멀리 서역의 고창, 구자까지 정복했다. 사실 당태종 본인도 선비족 과의 혼혈이므로 북방민족다운 성격이 없지 않았지만, 실로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 앞에 수세를 면치 못한 한족 왕조가 공세로 돌아섰던 것이다. 당태종은 귀순한 북방민족에게서 ‘ 천가한 (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의미였다.

    당태종은 제도의 정비와 문화의 창달에도 힘썼다. 10년의 노력을 들여 마련한 율령은 ‘당률’이라고 해서 이후 신라, 일본 등 ‘동양 문화권’의 정치제도의 근간이 된다. 또 도교와 불교가 지나치게 유행해서 귀족들의 방종을 낳았다고 보아, <오경정의>를 편찬하고 과거제를 강화하는 등 보다 금욕적인 유교를 장려했다. 당태종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직접 서법 서적을 짓기도 했으며, 따라서 전국적으로 서예가 크게 발전했다. 또 음악과 무용에도 관심을 보여 한족과 북방민족의 예술을 종합한 새로운 예술을 창시했다.

    두 가지 실수, 고구려와 후계자 선정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쌓은 당태종도 평화로운 세월이 계속되자 그만 말년에는 해이해졌던 것 같다. 신하들의 간언도 잘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위징이 죽은 뒤로는 그런 성향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결국 두 가지의 큰 아쉬움을 남기고 마는데, 하나는 후계자 선정이었다. 당태종은 맏아들 이승건을 황태자로 세웠지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황제가 된 아버지와 달리 태평세월을 만난 여유 때문이었는지 방탕으로 날을 지새더니 끝내는 황제 자리에 일찍 앉으려고 역모까지 꾸몄다. 그를 내쫓은 당태종은 평소 아끼던 넷째아들 이태에게 태자 자리를 주려고 했으나, 처남인 장손무기를 비롯한 원로들이 이태의 비리를 들추며 아홉째 이치를 미는 바람에 결국 그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원로들이 이태보다 재능이 많이 떨어졌던 이치를 밀었던 이유는 어린 황제 뒤에서 국정을 농단하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늙은 당태종은 젊어서라면 결코 넘어가지 않았을 수에 걸려 재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대업을 맡겼고, 태종을 이은 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에게 의지하면서 한 차례 왕조가 단절되는 사태를 초래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태종은 역사에 길이 체면을 구기고 자신의 명까지 재촉하고 만다. 태종으로서는 수양제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자신이 이룬다는 생각을 했겠고, 서, 남, 북으로 모두 ‘오랑캐’를 복속시켰는데 유독 고구려만 당나라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수양제 때에 비하면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더 충실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평생 전쟁에 져 본 적이 없었던 당태종의 용병술도 다시 한 번 빛났다. 그러나 “성을 함락시키면 사내들은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불필요한 말로 안시성 의 항전 의지에 기름을 부었음을 보면 당태종은 왕년의 신중함과 치밀함을 많이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태종이 화살을 맞고 눈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데, 오래 떠돌던 풍문을 고려 말의 이색 등이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가 고구려에서 참패하고는 퇴각하면서 얻은 병에 오래 시달리다 649년 7월 10일,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죽기 전 그는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는 방현령의 간언을 물리친 일을 후회하며, 태자에게 고구려 침공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어용 역사'와 신하들의 반격

    당태종이 중국사에, 아니 동양사에 남긴 영향 중 하나는 역사서를 국가적 사업 차원에서 편찬하는 관행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중국의 역사책은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진수의 <삼국지>처럼 개인이 연구하여 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당태종은 학문 연구 기관인 홍문관에서 <북제서>, <주서>, <수서> 등 여덟 권의 과거 왕조 역사서를 편찬하게 했으며(‘중국 24사’중 삼분의 일에 해당한다), 역사 기록의 주체를 개인에서 국가로 옮겼다. 이는 풍부한 자료를 활용하고 특정 개인의 사상에 치우치지 않은 역사가 나오게도 했지만, 한편으로 역사의 ‘어용화’ 경향도 나타났다. 사마천은 자신을 처벌한 한무제의 비리와 약점을 낱낱이 역사에 적는 등 서슴없이 ‘직필’을 휘둘렀다. 하지만 황제가 지휘하는 역사 기록 과정에서는 사관들이 꿈에라도 그런 비판을 시도할 수 없었고, 당나라의 개국 명분을 살리려고 수나라의 실정을 과장하거나, 당태종을 띄우기 위해 ‘현무문의 변’ 같은 사건 기록을 변조하는 등의 왜곡마저 저질러야 했다. 지금 전해지는 중국역사서와 그것을 본뜬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 삼국시대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렇게 황제와 왕조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을 할 수 없게 된 개인들, 즉 지식인들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역사 대신 정치론에서 제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관정요>다. 당태종의 정치의 요체를 담았다고 여겨져 온 이 책은 당태종 사후 50년쯤 뒤에 오긍이 저술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 ‘사치에 빠지지 말고 사사로운 욕심을 없앨 것’, ‘충신들을 곁에 두고 간신을 물리칠 것’ 등인데, 결국 요약하면 “(현명한)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야 좋은 임금”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정치론이고, 당태종의 실제 정치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임금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하들이 얼마나 잘 하는지에 따라 좋은 정치가 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신하 입장에서만 정치를 보았다고 하겠다. 이런 정치론은 주자학의 시대가 되면서 더욱 강화된다. 주자로 불리는 주희는 “당태종이 한 일은 모두가 사리사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며 당태종을 잊고 고대의 신화적인 명군인 요, 순을 받들라고 했다. 이런 성향은 본고장 중국보다도 주자학에 충실했던 조선에서도 받아들여져, 조선왕조에서 정치를 논할 때 당태종이 거론되면 “유교를 장려한 점과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형제를 죽이고 말년에는 사치를 일삼았으니 위대한 군주는 아니다”는 식의 평가가 늘 정답이었다. 용감한 무인이자 전략가였던 당태종, 유방과 조조의 재능을 가졌던 당태종의 진가를 평가하기에는 지나치게 인색한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