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여성의 왕위계승을막는 살리카법이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럽에서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하지못하게 막는 살리카법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여성의 왕위계승금지법인 살리카법이 생겨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안경국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럽에서 여성의 왕위계승을 막는 살리카법이란, 남성 후손들에게만 왕위를 계승시키는 법률이나 관습을 말합니다. 이러한 법은 주로 중세와 근대 유럽 국가들에서 흔하게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살리카법이 생긴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남성 우월주의: 중세와 근대 유럽 사회는 남성 우월주의가 강조되었습니다. 남성은 전통적으로 전쟁이나 정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고, 여성은 주로 가사 및 가족에 초점을 두는 역할을 갖추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와 관습이 왕위계승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안정한 상속체제 방지: 중세 유럽은 강력한 군주들이 소수의 귀족들과 왕실과의 권력 간 경쟁으로 인해 국가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경우 남성 후손들과의 갈등과 불안정성이 높아질 우려가 있어, 남성 후손들에게만 왕위계승이 허용되었습니다.
부성의 지속성: 왕위를 남성 후손들에게만 계승하도록 하는 것은 왕가의 부성을 보장하는 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왕가의 가문을 이어나가고 이를 강화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적 영향: 근대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도 여성의 왕위계승이 제한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령,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성이 성직자가 될 수 없는 규칙을 갖고 있었으며, 왕위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을 가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살리카법이 대부분 폐지되었고, 여성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리카법이 제정된 이유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법제정 취지는 여성에 대한 탄압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혼에 의해 영토나 작위가 뒤죽박죽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며, 중세에는 영주의 외동딸이 결혼할 경우 결혼지참금 명목으로 엄청난 영토를 가지고 시집을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자승계원칙 하에 여성의 작위 계승을 막는 법입니다.원래 귀족 작위는 모두 기사작위 입니다. 기사가 아니면 모두 안되는 것입니다. 허나 여성은 기사가 될 수 없으니 작위 계승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세기 유럽왕실은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양분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16세기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 에스파냐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유럽 최대의 왕실가문으로 부상하였던 합스부르크가는 18세기까지 직계와 방계가 모두 유럽왕실의 주축으로 건재하였다.
합스부르크가는 10세기경 스위스 북부의 작은 지역 소 영주에서 시작하여 11세기 합스부르크(매의 성이라는 뜻) 성을 쌓은 뒤부터 가문의 이름을 합스부르크라고 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왕실의 중앙 무대로 데뷔하게 된 것은 독일지역 제후들의 갈등 속에서 13세기 루돌프 1세가 어부지리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를 얻으면서부터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이 무렵 금인칙서를 통해 7명의 선제후가 황제를 선출하게 되어 있었는데 힘이 강한 제후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가장 약체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황제의 자리가 돌아갔다.
독일의 여타 제후들은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를 얕보고 그를 황제자리에 앉혔지만 그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루돌프 1세는 정략결혼으로 오스트리아를 획득하였으며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혼인관계를 통해 가문의 영토를 착실히 넓혀갔다.
그 결과 15세기에 이르러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일부, 헝가리, 뵈멘 등을 폭넓게 차지한 유럽명문가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합스부르크가는 16세기 혼인정책이 성공하면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에스파냐 왕실의 통혼으로 카를 5세 때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및 일부 지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이 거의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카를 5세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보유하는 오스트리아계와 에스파냐를 통치하는 방계 합스부르크가로 분열되었지만 18세기 초반,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유럽 대륙은 합스부르크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가의 유일한 상속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빠가 어린 나이에 요절한 이후, 그녀의 아버지 카를 6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차기 제위의 후계자에 대한 관심으로 유럽왕실은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유럽왕실은 어떤 식으로든 합스부르크가와 친척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 탐나는 자리의 상속권자로 이름을 올리고 싶어했다.
여자는 신성 로마 제국을 다스릴 수 없었고, 게다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 가운데 일부는 살리카법에 의해 남자만 상속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카를 6세는 자신이 죽은 뒤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분할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국사 조칙(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Pragmatische Sanktion)을 발표하고 살아 생전 모든 외교적 수단을 이용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보헤미아·모라바·헝가리 등 합스부르크 왕가 세습령의 상속을 여타 제후와 국가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여성이 제위에 오를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로트링겐 공 프란츠 슈테판이 오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의 소유권을 그대로 물려받아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겸 보헤미아의 여왕, 파르마 여공이 되었다.
출처 :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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