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는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된건가요?
사극드라마나 대대로 종가집인 곳을 보면 족보가 내려 오잖아요? 족보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한거고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족보는 중국 후한 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제작되고 있었다고는 하나,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16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본래 지배 계층 내에서도 유력 가계에서만 만들어지던 것이었는데, 이것이 일반 양반 가문에서도 보편화되어 가면서 17~18세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양반 가문이 족보를 구비하고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족보는 수록 범위나 방식에 따라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해당 성씨의 최초 시조부터 당대인들까지 모두 망라한 대동보, 같은 성씨 중 중간에 갈라진 분파의 구성원만을 수록한 파보, 족보 편찬자의 직계 혈연만을 기록한 가승보 등이 대표적인 족보 형태였습니다.
족보에 수록되는 사람의 범위와 형태 또한 매우 다양하였는데, 대체로 해당 집안의 여성과 여성의 후손들을 어떻게 기재하느냐에서 기인하는 차이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시집을 간 경우 남편은 여성의 성씨 족보에 기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성의 후손들의 경우는 여성 집안의 족보에 수록되느냐, 또 몇 대 후손까지 수록되느냐는 집안마다 차이가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서 조선 전기(1476년)에 편찬된 안동 권씨 성화보의 경우 여성의 자손들도 몇 대에 걸쳐 수록되어 있는 반면, 조선 후기에 편찬된 많은 족보에는 여성의 자손은 아예 수록되지 않았거나 친자식까지만 수록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부계 혈통 중심의 유교적 가족 윤리의 확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또 아들과 딸의 기재 순서도 차이가 있었는데, 조선 전기의 족보들은 연령순으로 기재한 반면, 조선 후기 족보들은 남자를 먼저 연령순으로 기재한 이후 여성들을 연령순으로 기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또 몇몇 가문에서는 여성들의 이름 대신 사위의 이름을 기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조선 사회 내 소수의 양반만 가지고 있던 족보에 일반인들이 수록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족보를 사고팔거나 위조하는 일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양반 사회가 종식되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양반에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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