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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9.30

문학산성을 왜 개축한 것인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문학산성은 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데요

이 문학산성은 왜 만들어진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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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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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0.0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학산성의 건립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학산성의 건립 연대는 문헌 자료가 전하지 않고 발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문학산성 안팎에서 삼국 시대 백제 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문학산 동쪽 구릉 지대에서 청동기 시대 주거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문학산 일대에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며, 문학산 주변에서 초기 백제의 타날문[두드림무늬] 토기 조각이 많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에도 대규모의 주거지가 분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1997년 인천광역시에서 실시한 문학산성 지표 조사와 2002년 인하 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학산 일대 문화유적 지표 조사에서 수습된 토기와 기와의 조각들은 대개가 삼국 시대 후기와 통일 신라 시대의 것입니다. 그 중에서 삼국 시대 초기 백제 토기 조각들도 적은 수가 수습되기도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산성을 쌓은 시기를 삼국 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산성에서 수습된 유물로 미루어 문학산성은 삼국 시대에 삼국 간의 영토 분쟁이 치열했을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점은 삼국 시대에 이미 문학산 주변에는 대규모의 주거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학산성과 여기서 발견된 출토 유물들은 백제 건국기 비류의 세력이 터를 잡았던 미추홀이 인천이었음과 삼국 시대 문학산이 서해안의 중요 요충지였음을 확인해 주는 자료들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한편, 문학산성은 조선 전기까지 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했는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인천의 사민들이 왜병을 격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때 인천 부사였던 김민선(金敏善)[1542~1592]이 주민을 이끌고 문학산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고, 산성 안에는 김민선을 기리는 사당인 안관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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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학산성은 삼국시대 때 백제가 주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토성을 쌓은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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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학산성은 조선 전기까지 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했는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인천의 사민(士民)들이 왜병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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