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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한사발
숭늉한사발23.04.19

조선시대에 사화는 어떻게 일어나게 됐나요?

조선시대에 사화는 따로 명분은 있었겠으나 결국에는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한 작업일건데요. 주요한 몇몇 사화들에서 숙청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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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화는 조선 전기 조신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은 정치적 사건이다. 발생한 해의 간지를 따라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로 불린다. 1970년대 이후 현대 한국사 연구에서는 ‘훈구파(勳舊派)’가 ‘사림파(士林派)’를 탄압한 사건으로 평가해 왔으며, 1990년대부터는 대간(臺諫)의 활동과 위상 변화에 초점을 맞춰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사화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상황적 배경은 1475년(성종 8)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최종적으로 반포되고, 20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첫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길고 힘든 과정을 거쳐 국법이 완성돼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지만, 곧 커다란 정치적 충돌과 숙청이 잇따라 발생했다는 모순적 상황은 사화를 이해하는 데 깊이 고려해야 할 상황적 맥락으로 지적된다. 이런 측면은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일어난 실험과 조정, 반발과 마찰이 사화의 주요 원인이었음을 알려 준다.

    『경국대전』의 완성은 관직 제도의 정비와 관련해 큰 의미를 지녔다. 특히 중요한 관서는 대간(臺諫)이었다. 국왕에 대한 간쟁과 주로 대신인 관원에 대한 탄핵이라는 기능이 『경국대전』에 명시됨으로써 대간은 비판적 언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견고한 제도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지배층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훈구 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군의 집단이 형성된 것이었다. 본래 ‘원훈구신(元勳舊臣)’이라는 의미를 지닌 훈구 대신은 세조 때부터 거듭 공신에 책봉되고 오랫동안 주요 관직을 독점하면서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의 위상은 세조가 붕어(崩御)하고 예종을 거쳐 성종이 즉위한 무렵에는 왕권에 상당한 부담이 될 정도로 높아졌다.

    성종은 재위 7년까지 자성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과 주요 대신으로 구성된 원상제(元喪制)를 거친 뒤에야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성종의 우선적 과제는 왕권을 정상적으로 행사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먼저 훈구 대신의 영향력을 제어해야 하였다. 성종은 대간의 언론 활동을 지원해 대신을 비판하게 하고 자신의 왕권도 강화하였다.

    그 결과 성종 중반 이후 중앙 정치의 권력 구도는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대신과 대간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보장된 탄핵과 간쟁을 용인한 결과 대간은 계속 영향력을 키웠고, 성종이 치세를 마치기 직전에는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다.”고 평가될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화 [士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오사화 - 사초 문제(조의 제문)

    갑자사화 - 윤비 폐출 사건

    기묘사화 -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에 대한 훈구 세력 반발

    을사사화 - 외척 간의 갈등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4번의 큰 사화가 있었습니다.

    1. 무오사화(연산군):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부당하게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을

    비판한 것이라는 훈구파들의 주장과 사림파를 싫어했던 연산군의 의중과 맞아 떨어져 이 명분으로 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비판하는 삼사 등 사림의 말이 거슬렸을 것이고 이 것을 명분으로 거침없이 행동하게

    됩니다.

    2. 갑자사화(연산군):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을 연산군에게 알리고 이에 격분한 연산군이

    사화를 일으켜 관련된 아버지인 성종의 후궁, 수많은 선비들을 사사했던 사건입니다.

    3. 기묘사화(중종): 훈구파들이 조광조 등의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로써 중종이 관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종의 의중이

    어느정도 작용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4. 을사사화(명종): 대윤과 소윤의 정치싸움이었고 중종의 사후 중종의 첫째 아들 인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인종은 소윤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정왕후에게 효를 다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인종은 병약했고 왕위에 오래 있지 못하고 이복 동생인

    명종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죽게 됩니다. 권력을 잡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 소윤 세력이 꼬투리를 잡아서 대윤세력인 윤임 등의 세력을

    정치적인 이유로 무참히 죽인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화(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5차례의 옥사를 말합니다. 이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 순 입니다. 이들 사화의 명분은 차례 대로 1. 김종직의 <조의제문사건> , 2 폐비 윤씨 시건 3. 조광조의 개혁 정치 4. 소윤과 대윤의 권력 싸움 등으로 일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