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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7.01

지금은 고속도로의 상징이 된 경부고속도로는 어떤 시대적 필요에 의해서 건설하게 된 것인가요

서울과 부산을 있는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산업의 혈맥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경부고속도로를 처음 만들 적에 반대도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게 된 당시의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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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교통 인프라는 철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1950년대 중반 도로기술 공무원들이 미국의 도로 및 도로 공사 연수를 시찰하면서 미국의 고속도로를 처음 접한 바 있으나 당시 자동차는 부유층들이나 가질수 있던 비싼 사치품이었고 천문학적인 예산 소요 등으로 고속도로 건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필요성이 정부 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해 1960년대 이르러 국토건설본부가 설립되고 1961년 국토개발문제를 우선적 과제로 삼기 시작합니다. 이에 국토계획기본구상, 국토선설종합계획법 등을 통해 국토종합개발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국토개발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나 1960년대 초반까지 정부는 향후 수십년간 한국에 고솓도로는 필요없다는 한미합동조사위원회 등 국내외 전문가들의 용역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부터 시행된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물론 2차 경제개발계획에서도 철도 예산이 도로 예산의 3.5배로 책정되는 등 그때까지 과거 일본처럼 철도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들어 한국에서도 자동차 보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교통수단으로서 자동차 성능 향상과 보급이 눈부시게 이루어지던 당시 사회 전반에서 자동차 도로 확충에 대한 요구가 나오게 되며 60년 중반 도로의 향후 수요 증가량, 도로가 여객, 물류 두 부분에서 철도를 압도한다는 전망들이 속출했고 도로교통망 확충에 대한 요구도 높아집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도 전향적으로 이러한 요구와 전망을 수용합니다.

    한편 주원 전 건설부 장관 등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이미 고속도로에 관심이있었고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 도입을 요청하기 위해 9박 10일 일정으로 서독을 방문했을 때 서독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독 전국 각지의 산업시설을 시찰시켜줬는데 이때 아우토반을 여러 번 왕복하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고속도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에서 잠시 차를 세우도록 하며 노면과 분리구조물 등의 재질을 직접 확인해보기도 했고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 건설 비용 등을 물어보고 수첩에 적기도 했다고 합니다.

    귀국 후 1965년부터 정부에서 비공개로 고속도로 건설계획안에 대한 내부 검토가 시작되었고 박정희 전기를 작성한 마이클 키온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찾아 놓으라고 지시했다고 하며, 선진국,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의 고속도로 관련 정보도 있으면 가리지 말고 전부 구해다 놓으라고 지시했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 본인도 그 자료들을 매우 자세히 읽었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고속도로 기본설계나 공사비를 산출해보았다고 합니다.

    약 2년간의 연구 후 1967년 대통령선거에 재선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국민들에게도 정부의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알려지게 되었고 1967년 5월 재선에 당선되자 고독도로 건설은 공식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합니다.

    1967년 국토계획기본구상이 수정, 보완되며 대국토건설계획서(안)이 나왔고 경인 6차선 도로계획 등이 최초로 정부 문서에 명문화되기 시작했고 1967년 12월 15일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조사단을 발족시켜 건설을 체계적으로 준비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가장 큰 목적이 경제적 효과에 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가장 중점에 두었던 것은 '할 수 있다'는 의식의 고양(高揚)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