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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밝은큰고니2724.03.10

일본에 할복자살하는 풍습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에서는 무사나 사무라이 같은 사람들이 할복을 하여 자살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일본에 할복자살하는 풍습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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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에서 과거 사무라이들이 할복 자살하는 전통은 무사도의 일환으로 명예를 중시하는 일환으로 여겨졌습니다. 할복의 이유는 명예 회복, 책임 수행, 충성의 표시, 수치를 회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할복은 사무라이의 명예를 존중하는 사형제도로 17세기 이후 더욱 정형화됩니다. 할복 시에는 복부를 깊게 가르고, 보조가가 뒤에서 목을 베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할복 자결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3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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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할복이라는 것은 자살의 한 방법으로써 '무사도'를 중요시하는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행하던 '자결'방법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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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반적으로 할복의 원조로 꼽는 것은 헤이안 시대 말기의 장군인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이다. 여러 가지 다른 견해도 있으나, 할복이 가장 성행하였던 에도 시대 사무라이들이 할복의 원조를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로 보았기 때문.


    이후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와 할복자들이 종종 보이기 시작하더니,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할복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당시 무사도의 개념이 원숙해짐과 더불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 실례로, 가마쿠라 막부의 탄생을 다룬 헤이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할복은 6건에 불과한데 반해, 무로마치 시대 이야기인 태평기에 기록된 할복은 무려 2,140건에 달한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할복은 대체로 전쟁, 전투에서 패배한 장군이 행하는 경우에 국한되었으며, 극형이나 순사 등 전쟁이 없을 때에 행해지는 경우는 적었다. 또한 엄격히 말해 이런 사례가 모두 형식적으로 제대로 된 할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대체로 당시 기록에서 패장이 적군에게 붙잡히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자인(自刃)했다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후세의 할복처럼 '배를 가른다'는 고정된 형식으로 해석하기 어렵고, 좀 더 포괄적으로 스스로 날붙이를 써서 자살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패배 이후 할복(내지 자인)하기 시작한 것에는 명예와 자존심 이외의 다른 목적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는 바로 적군에 의해 효수당하는 불명예를 피한다거나 자신의 죽음을 숨기려는[3] 등의 실질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 실제로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몇몇 장수의 경우 목이 발견되지 않거나 목이 달라보였다는 이유로 생존설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제법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와 아케치 미츠히데.


    어쨌든 이러한 할복 내지 자살이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할복이라는 형태로 극도로 형식화, 절차화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당시 어떤 기록은 시골 사무라이들이 정확하게 할복하는 작법을 모른다며 비웃는 내용을 적었을 정도인데, 이는 당시 할복이 작법이란 것이 등장하였을 정도로 절차화되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이때부터 할복이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한 경우 뿐 아니라,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경우 내지는 정치적인 수단으로서까지 사용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전쟁이 없을 때에도 순사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할복의 성격이 명예와 결합된 정치적인 수단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센코쿠 시대의 무사인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들 수 있다.


    당시 시미즈가 속한 모리 일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침공을 받고 있었는데,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여 히데요시가 긴급히 군대를 회군하게 되어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그런데 히데요시 측은 동맹의 조건으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했고, 무네하루는 굳이 할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4]임에도 불구, 더 이상 다른 요구를 묻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자신의 검으로 배를 갈랐다. 이에 한시라도 빨리 군대를 회군해야 되는 히데요시조차도 무네하루의 할복을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 하며, 그의 할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훗날 일본을 석권한 다음 그 아들인 카게하루에게 "다이묘로 삼아줄 테니 나의 직신[5]이 되어라"라고 제안하였으나, 카게하루는 모리에 대한 의리로서 그것을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무사도의 본질을 관통하는 일화로서 유명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지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할복이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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